eve - 지옥의 징조 - 2장. Self decision. 각자의 결정
| 21.01.27 12:00 | 조회수: 1,967


모두가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웠다. 트리에스테 대륙은 위기 상황이었다. 적은 늘어가고 있었고, 카론은 언제 닥쳐올지 몰랐다. 그런데 이제 와서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은 납득이 되질 않았다.

칸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칸은 캄비라 바투가 파그노에게 상처를 입힌 이후로 신경이 점차 날카로워졌다. 캄비라 바투가 일행과 함께 하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기도 했지만, 오빠를 지키지 못했다는 칸의 자책감도 깔려 있었다.

때문에 칸은 이제 해산이라는 가리온의 말이 차라리 기뻤다. 모양새 좋게, 타의로 보기 싫은 캄비라 바투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었다.

칸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제노아로 돌아가면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을 만나 수다도 떨고 가끔 검을 들어 대련하고, 생활은 안정될 것이라고.

카론이 트리에스테 대륙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하루에도 몇 백, 아니 셀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이 죽어나갔지만, 그 뿐이다. 살 사람은 어떻게든 또 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며, 어차피 인간이란 죽어가고 있는 존재이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세상을 구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렇다고 더는 힘들고 불편한 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칸은 파그노를 설득하려 했다.

“제노아로 돌아가요.”

“무슨 소리야?”

파그노의 생각은 달랐다.

파그노는 크레스포에 와서야 새로운 자신을 찾은 기분이었다. 자신도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고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자신이 어디까지 더 성장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가슴 벅차는 삶을 새로 시작하려는데, 해체라니. 파그노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그것은 고민한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파그노는 떠나려는 칸을 말렸다.

“말도 안돼.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이미 여기까지 왔잖아?”

“떠나라잖아요.”

“아직 적들은 많아.”

“누군가 영웅이 되겠죠.”

“하지만.”

“나 때문인가?”

캄비라 바투가 끼어들었다.

칸은 캄비라 바투를 노려보았다.

“난 떠날 거예요.”

“도망치는군.”

“…!”

칸은 일어섰다. 에바가 갔던 길로 빠르게, 도망치듯 달렸다.

“칸! 칸!”

파그노는 자리에서 일어서기는 했지만 차마 칸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데카론이야! 데카론이라고!”

원래 조용했지만, 더욱 조용해졌다.

파그노는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어쨌든 데카론이라고….”

파그노의 말이 아직 앉아 있는 모두의 가슴에 닿았다.

칸은 슬펐다. 오빠 파그노마저 자신을 버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나와 함께 오지 않았으니, 버린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더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칸은 홀로 떠나기로 결심했지만 갈래 머리에 드러난 유난히 우락부락하게 굴곡진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으읍.”

칸은 눈물을 닦아내려 애썼다. 눈물을 훔치던 손으로 꾸린 짐을 들고 조금은 익숙해진 크레스포를 가로질렀다.

죽었지만, 힘들게 숨 쉬고 있는 크레스포. 이계에 오염되어 버린 돌이킬 수 없는 도시. 칸은 지금의 자신이 꼭 그런 것만 같아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후회가 들기도 했다. 조금만 자신이 유약 할 수 있었더라면, 조금만 물러설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물론 이런 뒤늦은 후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칸은 이 조용한 도시를 홀로 떠날 것이니까.

“이제 모두 아무 것도 아니야….”

칸은 그렇게 마음 먹기로 했다.

조용하게 아무 일 없는 듯 하지만, 사실 이곳은 전쟁터에 불과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거리를 다니고 있지만, 여기 있는 그들 모두는 각자의 무기를 들고 전쟁으로 하루를 보냈다. 칸 역시 그렇게 지내왔다. 생존하기 위한 칼부림, 몸부림을 쉬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래. 질렸어. 더는 안 해….”

칸은 그렇게 자신에게 속삭이면서 검을 만지작거렸다.

사실은 그 칼부림으로 지금껏 살아오던 칸이었다.

제노아에서 검을 드는 일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나 검을 다루는 것을 기본으로 생각했다. 물론, 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여자는 드물었다.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칸은 최고였다. 얼굴이 아름답지 않았지만 검술이 아름다웠다. 그래서 더 검술을 연마했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노아 밖에서의 세상에서 칸은 최고가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싸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잘 싸우면 오래 살고, 못 싸우면 죽음이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공평했다. 게다가 칸과 같은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실력뿐이 아니었다. 에바와 시에나처럼 뛰어난 외모로 관심을 받고, 사랑을 하는 모험을 즐기는 여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칸은 자신이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을 지키지도 못했다. 칸은 이렇게 자신을 더욱 벼랑으로 몰고 있었다. 깊은 생각은 불안한 마음을 키울 뿐이었다.

‘어쩌면, 모두들 내가 떠나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라.’

슬프고 우울한 마음은 겉잡을 수 없이 꼬이고 뭉쳤다.

‘봐, 아무도 날 붙잡아 주지 않잖아…. 오빠마저도….’

스스로에게 던진 비수가 절대로 깨지지 않을 돌처럼 묵직하게 굳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다. 칸은 죽음의 도시 크레스포에서 유령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도시를 훑어볼까, 마지막으로 뒤돌아볼까 잠시 망설였지만, 곧 그만 두었다.

‘난… 이미 죽은 사람인 거야….’

칸은 돌아보지 않은 게 아니라, 돌아 볼 수 없었다. 누구도 붙잡아주지 않는 초라한 자신을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하하….”

칸은 그냥 한 번 웃어보고, 굳은 살이 베긴 두꺼운 손으로 얼굴을 쓰윽 문질렀다.

“그래. 혼자서 갈 수 있잖아.”

칸은 이를 물었고, 도시를 나섰다. 예상했던 대로 나서자마자 사람 피에 굶주린 괴물들이 칸을 보고 달려 들었다. 칸은 검을 들었다. 피하거나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지금껏 스스로가 스스로를 돌보아 왔고, 지금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려 검을 써왔던 것처럼 하면 되는 일이었다. 혼자라는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그래. 어차피 처음부터 단체 행동이라는 것,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는지 몰라. 내가 나를 챙겨야 하는데 어떻게 세상을 구할 수가 있겠어. 내 주제에 넘치는 일이었어.’

눈에 눈물이 또 고였지만 닦아내지 않았다.

칸은 눈 앞의 괴물을 검으로 가르고 힘으로 밀쳤다. 그저 몸을 앞으로 숙였다가 괴물의 품으로 뛰어들어 복부를 긋고 밀쳐내고, 그 옆의 괴물, 또 그 옆의 괴물을 긋고 밀쳤다.

‘차라리 내가 괴물 같다…. 훗.’

괴물을 상대하는 지금, 칸은 자신이 오히려 괴물인 듯 느꼈다. 버티지 못하고 도망쳐 버리는 약해빠진 괴물, 혼자 우울에 빠져 썩은 내를 풍기는 괴물, 어디에 섞이지도 못하고 홀로 남겨진 괴물.

칸은 우뚝 멈췄다.

“허억…. 허억….”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좁은 어깨가 심하게 들썩거렸다.

“하아…. 하아….”

무기력한 자신을 깨달은 그 순간 모든 힘이 빠져 나갔다.

“제길. 제길. 제길. 제길. 제길!”

눈물과 욕지거리가 한바탕 쏟아져 나왔다.

“그냥…. 차라리….”

칸은 더 싸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위협하며 다가오는 이계의 괴물들은 끝이 없었고, 칸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반경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나 하나쯤…. 하하….”

포위당하고 있었지만, 칸은 더 싸울 의지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오빠 없이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이대로 죽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결과일 거라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칸은 일부러 검을 떨어뜨렸다. 더 아쉬울 것도 없었고, 아쉬워할 사람도 없었다. 돌아갈 곳은 사라졌고, 혼자서 크레스포를 뚫고 제노아로 돌아가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적의 손에 죽으면…. 명예로운 것이겠지.”

칸은, 상황을 인정하려 받아들이려 크게 호흡했다. 죽으면 편해지려니 위안 삼으려 했다. 마음은 길을 잃었고 점점 무거워졌다. 모든 것을 확신할 수 없어 슬펐다.

“죽으면…. 죽어버리면….”

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자 모든 상황이 귀로 쏟아 들어왔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난무하는 악마들의 소리들, 설원을 휘몰고 가는 세찬 바람 소리들, 죽어가는 사람의 소리까지. 고요히 죽음을 맞이하려는 칸을 방해했다.

칸은 한 번 더 심호흡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소리가 들렸다.

샤악. 샤악. 눈을 밟고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

쉬익. 쉬익. 사악한 괴물의 뼈가 갈라지고 핏방울이 튀는 소리.

터엉. 터엉. 오랜 여행으로 무뎌진 철 갑옷이 출렁이는 익숙한 소리.

칸은 자신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눈을 뜨고 확인하지는 않았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서였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서러웠다.

“…아!”

누군지 알았다. 칸은 고개를 진저리를 쳤다. 익숙한 소리가 반가웠지만, 이렇게 무너지고 싶지는 않았다. 동료들이 있었기에 여기 크레스포까지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자신이 비참했다. 더 견딜 수가 없었고 칸은 눈을 부릅떴다.

“…!”

칸을 포위했던 괴물들은, 이계의 사악한 적들은 피범벅, 흙 범벅이 되어 흩뿌려져 있었다. 어쩐지 분했다. 이러려고 돌아선 게 아니었다.

“칸. 괜찮니?”

오빠의 목소리. 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사과한다면, 같이 가겠나?”

바기족의 목소리. 칸은 버렸던 검을 주웠다.

“이게…. 다. 너…. 너 때문이야….”

누구, 말릴 새도 없었다. 칸은 검을 들고 캄비라 바투에게로 내달렸다. 파그노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칸!”

다음 순간, 칸의 검은 캄비라 바투의 어깨 위에 있었다. 파그노가 상처를 입었던 바로 그 위치였다.

“안돼! 칸! 멈춰!”

파그노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칸은 멈추지 않았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칸의 검이 캄비라 바투의 어깨를 그어낼 참이었다.

“아!”

놀라움과 두려움이 칸의 얼굴에 가득 퍼졌다.

“피를 보았으니, 이제 용서할 텐가?”

캄비라 바투는 얇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칸의 검을 부여 잡았다. 검은 가죽을 끊고 피부를 짓이기고, 짓이겨 피를 불렀다. 고름이 터지듯 캄비라 바투의 손을 타고 피가 흘러 내렸다.

“…. 모두에게 미안해. 나 혼자서는 떠날 수가 없었어!”

칸은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검을 놓치고, 바닥에 주저 않았다.

파그노가 칸에게 달려왔다.

칸의 검에 찔린 캄비라 바투의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시에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괴로웠다.

“너무 걱정 마시오.”

시에나의 굳은 표정이 자신의 상처 때문인 줄로만 아는 캄비라 바투는 다정히 말했다.

“아…. 네.”

시에나는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타마라는 캄비라 바투가 다치던 말던 신경 쓰지 않았다. 캄비라 바투보다는 가리온의 문제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타마라는 가리온을 혼자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타마라가 곤란했다. 비나엘르 파라이와 세그날레의 계약, 타마라는 그것을 이행해야 했다. 에바가 떠나는 것은 상관없어도, 가리온은 잡아야 했다.

'이렇게는 안돼.'

타마라는 시에나를 힐끗 보았다. 다른 일행들은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느라 눈치채지 못했지만 타마라는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시에나는 겉으로 태연한 척 했지만 가리온이 떠난 후 계속 불안해 하고 있었다.

시에나는 타마라가 뚫어지게 보는 줄도 모르고 캄비라 바투의 팔에 붕대를 감았다. 칸은 파그노 옆에서 가만히 캄비라 바투의 손을 응시했다.

“자, 이제 가리온만 다시 만나면 되는 건가?”

파그노는 쾌활하게 말했다.

룸바르트는 에바를 잊지 말라고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지금 룸바르트 혼자서라도 에바를 쫓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옳지 않아.’

에바는 가리온 때문에 떠났다. 붙잡아야 할 사람은 가리온이다. 그 편이 에바에게도 좋을 것이었다.

룸바르트는 어쩐지 씁쓸했다. 자신은 에바를 붙잡을 수도 없었고, 가리온이 떠나라고 한다고 떠나주는 것도 우스웠다.

‘웃기는 자식.’

때문에 룸바르트는 마음을 정했다.

‘떠나라고 하니까, 같이 가준다.’

룸바르트 자신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서고 싶었다. 죽음마저 정해져 있는 인생이라면, 어떻게 살지는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다.

“그런데 가리온을 어디서 찾지?”

헤이치 페드론의 물음에 모두 타마라를 보았다. 타마라가 예언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밀스러운 것을 많이 알고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글쎄요.”

타마라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며 되물었다.

“시에나.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시에나는 갑작스런 타마라의 질문에 흠칫 놀랐다. 쏟아져오는 모두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이 떠올랐다.

크레스포에서 바루나가 말해주었다. 칼리지오 밧슈의 후손이 가고 있다는 바라트.

“나… 나도. 잘….”

“그래요?”

시에나는 일단 침을 꿀꺽 삼켰다.

‘일단은. 진실을 확인하고 싶어.’

시에나는 결심했다. 그래서 애써서 돌려 말해보았다.

“이미 왔던 곳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 같고…. 뭐…. 불의 사슬 쪽으로…. 엘타에…. 항구가 있으니.”

“그렇겠군요.”

시에나는 놀랐다. 타마라가 자신의 말을 적당히 끊어주었다.

‘타마라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거지?’

“자, 그럼 우리도 불의 사슬 쪽으로 가볼까요?”

“여기서 어떻게? 다시 브라이켄 성까지 가서 돌아가기는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바로 여기서 산맥을 타고 가면 되죠.”

모두 입을 쩍 벌렸다.

“타마라. 추위를 즐기는 거야?”

타마라는 룸바르트를 향해 웃었고, 일행은 곧 가리온을 찾으러 나섰다.

싸늘한 하이하프의 눈바람은 동쪽으로 향하는 일행을 가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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