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그노가 몸을 회복하자마자 가리온 일행은 요새를 떠났다.
그 동안 일의 경과가 궁금해 몸이 달았던 오스카는 서둘러 바론에게 달려갔다.
“어디로 보내는 거야?”
“크레스포로 간다더군.”
“간다고? 보내는 게 아니라? 어쩌려고 그러지?”
“듀스 마블을 찾고 있어.”
오스카가 고개를 젖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라면 이쪽에서 안 찾겠네.”
“아직 덜 여물어서 그렇지.”
“자네가 좀 여물게 해주지 그랬나?”
바론은 창가의 얼음을 뚝뚝 쪼개어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는 이미 충분히 오래 기다렸네.”
“그럴까….”
“자네는 뷰라보 랜더님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은가? 그 용맹한 모습을! 억울하고 비통한 마음에 스스로를!”
“알아. 나도 뵙고 싶네.”
바론은 작은 얼음 조각을 손으로 녹였다.
“…. 그런데 말이야.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
오스카는 바론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 봤다.
“뷰라보 랜더님이 정말 강하셨다면 말이야….”
바론은 더 큰 얼음 조각을 쥐어 주먹으로 오므렸다. 손아귀 힘에 얼음은 잘게 부서졌고, 금새 녹아 흘렀다.
“정말 강하셨다면…. 우리를 이렇게 남겨놓고, 스스로를 봉인하기 보다는. 백기사단을 청기사단만큼, 아니 청기사단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게, 지금의 인카르 교단보다도 더 훌륭하고 멋진. 그런 트리에스테 대륙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키우셔야 하지 않았을까?”
“바론….”
오스카는 한 동안 말을 잊었다가, 겨우 대꾸했다.
“자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바론은 얼음을 쥐었던 손을 탁탁 털었다.
오스카는 그런 바론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 그럴 생각이나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것은 마치 변명처럼 느껴졌다.
“뷰라보 랜더님은 후사를 위해 그러신 거야. 자네도 알잖아. 카론이 언제 어떻게 부활할지 사실은 누구도 몰라. 그러니 당연히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거야.”
바론은 냉정히 받아 쳤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두 개의 달은 서서히 가까워져 가고 있어. 그리고 방금 전까지 우리의 두 눈은 카론을 부활시킬 증거를 확인했어. 그래도 모자라?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까?”
“도대체 자네의 불만이 뭐야!”
오스카는 바론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바론이 예전과 달라진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
“뭐가 불만이라서, 계속 꼬투리를 잡고 있지?”
오스카의 질문에 바론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이 요새에 갇혀 있다는 점….”
오스카는 할 말을 잃었다.
바론은 가리온의 일행들처럼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고 있었다.
오스카는 당연히 그런 바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젊었던 시절을, 함께 이 빙곡에서 보냈으니까. 오스카 역시 이곳을 벗어나고자 상인의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는 카론이 부활하는 것을 막겠다고… 했네….”
바론은 어느 새 의자를 기대고 있었다.
“예전에…. 물러서지 않고…. 다시 전진했다면…. 우리는. 이 땅의 사람들을 죽게 할, 카론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을 거야….”
오스카는 바론이 기댄 의자에 다가가 손을 더했다.
“카론이 부활하는 것은 필연적이야. 운명이라고. 자네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원래부터 카론은 부활하게 되어 있었던 거야. 우리가 카론만 기다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네. 우리는 뷰라보 랜더님과 한 번 더 같이 뛰고 싶어했어. 그래서 이렇게 기다렸지 않은가. 인내는 쓰지만 달콤하다네.”
바론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그래… 이제는 어쩔 수가 없지…. 흐흐”
“그래. 이제 마지막 준비만 하면 되는 거야.”
오스카는 바론을 일으켜 세웠다.
“오스카….”
“말하게.”
“이렇게 썼으니까, 더 달콤하겠지? 흐흐….”
“훗. 그렇겠지?”
두 사람은 크레스포를 등지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크레스포.
과거, 광산의 미스릴로 엄청난 부를 누렸던 도시.
지금은 오염의 근원지이며 끊임없이 이계의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는 곳.
누구나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트리에스테에서 헬리시타만큼이나 유명한 곳.
듀스 마블이 결계를 친 곳.
그리고, 트리에스테 대륙에서 현재 제일 위험한 곳.
이 많은 수식들이 전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리온은, 요새를 나오자마자 느꼈다.
숨돌릴 틈도 없이, 꾸불꾸불한 골짜기에 괴물들이 들이닥쳤다.
이계의 힘이 불러낸 분노와 폭력의 악마 아이슈마 헌터, 아이슈마마랜서, 아이슈마파이터, 아이슈마워리어, 이계의 오염으로 생성된 거인 프로즌자이언트, 이계의 전사 카타스트로프까지. 지난 번 데카론들과 싸우는 동안 이 많은 괴물들이 어떻게 나타나지 않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몰려들었다.
덕분에 가리온의 일행은 고작 열 걸음을 움직이는데 두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젠장, 끝이 없어.”
“조금만 더 가면 돼!”
“아까부터 그 소리하고 있는 거 알아? 타마라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벌써 죽었어!”
“그래서 여기서 죽으려는 거야?”
가리온은 룸바르트에게 버럭 소리지르며 앞서 나갔다.
“크레스포는 멀지 않았어요.”
타마라가 끼어들었다.
룸바르트는 가리온에게 투정부리던 것을 멈추고 타마라를 향했다.
“저 자식, 방식이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슬며시 물었다.
“어째서 크레스포에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타마라는 웃었고, 이번에는 에바가 끼어들었다.
“힘들다며? 그냥 조용히 싸우지?”
룸바르트는 에바를 보다가, 옆의 시에나를 보았다.
“저 계집을 의식하고 있군.”
시에나는 원래가 그랬듯이 오로지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고백하지 그래?”
에바는 대꾸하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잠깐! 저기 뭔가 있다!”
뒤에 있던 파그노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파그노는 전과 별로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어색하지 않기도 했다.
다만, 동생 칸과 함께 캄비라 바투를 의식하고 피할 뿐이었다.
“저기! 저거 경비병 아니야?”
파그노는 길을 터서 경비병에게 다가갔다.
“여기가 어디요?”
경비병은 파그노를 물끄러미 보더니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
파그노는 기가 막혔다.
“당신, 지금 장난하는 거야?”
“이곳이 크레스포로 가는 검문소라는 것을 모르는 당신이 난 더 이상하군.”
경비병은 파그노를 비꼬아 말했지만, 더 이상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파그노는 여전히 싸우고 있는 일행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여기! 다 왔어! 크레스포! 크레스포랍니다!”
황당해하는 경비병을 뒤로 하고 파그노는 손짓 발짓을 했다.
“크레스포!”
가리온의 일행은 서둘러 싸움을 마무리 짓고 파그노에게 달려갔다.
“여기가 크레스포요?”
가리온이 물었다.
가뿐 숨과 흥분이 벅차게 뛰었다.
“그렇소. 그러나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소.”
경비병은 가리온과 일행들을 한 명, 한 명, 유심히 살폈다.
캄비라 바투를 보다가는 바기족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전에 바기족 두 명이 이 길을 지나갔었지. 둘 다 무사히 나오긴 했지만.”
경비병은 그들이 죽지 않아서 유감이라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캄비라 바투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혹시 매우 작지 않소?”
“그렇소.”
캄비라 바투는 한 명의 바기족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누트 샤인…!’
가리온과 시에나도 캄비라 바투가 이야기하는 자가 누구인지 금방 눈치챘다.
노라크 동굴에서 당했던 일을 두 사람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크레스포는…’
세 사람의 생각이 교차할 때, 경비병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당신 둘은 들어갈 수 없소.”
그것은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 아즈에게 한 말이었다.
“이곳은 자격 있는 자만 들어갈 수 있소. 자격이 안 된다면 들여보낼 수 없소.”
“그 자격이 뭔데 그러시오?”
헤이치 페드론은 참을성 있게 물었다.
“그냥 보기에도 당신 둘은 싸움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어떻게 이 생지옥 안으로 밀어넣겠소?”
“우린 괜찮소.”
“안돼요. 안돼.”
“나는 청기사단장이오.”
가리온은 크루어를 경비병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경비병의 얼굴이 약간 변하는 듯 했다.
“내가 책임을 지겠으니, 모두 함께 가게 해 주시오.”
“그래요. 열 두 명이 아니면 의미가 없죠.”
타마라는 가리온의 말에 추임을 넣었다.
“그렇지만….”
경비병은 이리저리 눈치를 보더니 빠르게 말했다.
“지금 아모스가 없으니, 당신들을 들여보내 주겠소. 그러나 책임은 당신이 지시오.”
경비병은 가리온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하지도 말고.”
“걱정 마시오.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파그노는 경비병에게 큰소리치며 제일 먼저 크레스포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일 먼저 후회했다.
빙하의 마신 코라이거가 소환하는 패러사이트의 진화형 이계 괴물이 떼를 지어 마치 가리온의 일행을 기다렸다는 듯이 휜 칼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