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bivalence - 타인과 적 - 7장. Reliance. 마주 닿은 등
| 21.01.20 12:00 | 조회수: 966


눈바람은 마침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빙곡을 가득 채웠던 이계의 생명체들은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보이질 않았고, 낮고 흐린 하늘 아래의 눈 쌓인 계곡마다는 수십 명의 데카론들만 가득했다.

그들의 사냥감은 이계의 생명체가 아니었다.

표적은 가리온이었다.

가리온의 일행에는 그 이유를 물을 시간이 없었다.

가리온임을 확인하고 곧바로 공격해왔기 때문이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밟고 얼어버린 바위 뒤에서 데카론들이 쑥쑥 튀어나왔다.

‘데카론에게 공격을 받는다.’

그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나름의 사연이 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가리온과 함께 복수의 빙곡까지 온 일행 모두는 트리에스테 대륙을 구하기 위한 데카론에 참여한 지원자였다. 카론을 처단한다는 궁극적인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싸우는 동료이자, 전우였다.

소속된 단체에서 당하는 배신감이라는 충격은 대단했다.

모두의 얼이 그대로 빠져버렸다.

그 중에서도 제일 기막힌 것은 가리온이었다.

가리온 역시 일행들처럼 데카론에 동참한, 같은 배를 탄 전우 중 하나였다.

또한 가리온은 청기사단의 단장이었다.

원래 청기사단 단장은 인카르 교단의 호위를 맡는 것이 관례였지만 가리온은 특별히 인카르 신전을 떠나 듀스 마블을 쫓고 있었다.

그랬다.

가리온은 특별히, 이례적으로 비나엘르 파라이의 부탁을 받고 듀스 마블을 저지하려고 여기 복수의 빙곡까지 왔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리온더러 백기사단을 만나라고 했다. 백기사단을 만나면 듀스 마블의 행방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죄 의식 직후 듀스 마블에 끌려간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를 구하기 위해, 카론에게 트리에스테 대륙을 넘기려는 듀스 마블을 막기 위해 나선 여정이었다.

그런데 데카론이 가리온의 뒤통수를 쳤다.

‘속은 것인가?’

가리온의 심장이 불타올랐다. 억울한 분노가 솟구쳤다.

‘왜, 나를 속였지? 비나엘르 파라이는 왜 나를 속인 것이지?’

가리온은 생각했다. 생각하려고 애썼다.

지금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인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생각하려고 애썼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어째서 자신에게 청기사단장을 맡겼고, 데카론에 참여하게 했고, 듀스 마블을 쫓도록 했는지, 그 모든 이유를 당장 밝혀내고 싶었다.

그러나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가 너무 뻔했다.

트리에스테 대륙을 혼란 속으로 몰아 넣었던 카론, 카론을 트리에스테 대륙에 불러낸 알로켄 칼리지오 밧슈. 그리고 그랜드 폴 이후 사람들이 세운 인카르 교단의 여신인 비나엘르 파라이.

‘내가 알로켄족이라서!’

가리온은 더욱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내가 알로켄족이라서, 나를 죽이려는 거다. 내가. 내가 칼리지오 밧슈처럼 그랜드 폴을 일으킬까봐!’

자신의 앞에서 친절히 웃던 비나엘르 파라이의 얼굴이 떠오르자, 속았다는 사실을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알로켄이나 그랜드 폴 모두 원치 않아!’

온 몸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으아아아!”

가리온은 앞에 있는 기사의 목부터 베기 시작했다.

에바는 기사의 머리를 단칼에 베어내는 가리온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슬퍼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구라도 그런 믿음을 배신당하게 되면 견딜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에바는 좀처럼 싸울 수가 없었다.

막상 자신과 같은 세지타족을 보게 되자 활을 들 수가 없었다.

세지타족을 향해 활을 쏘는 것을 시도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에바는 아이리스 비노쉬와 네디앙에게 활을 겨누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두 번 다 쏘지 못했다.

그 때 쏘지 못했던 이유와, 지금 싸울 수 없는 이유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과 너무도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세지타를 쏠 수는 없다는 점만은 같았다.

쿵.

가리온은 기사의 목을 베고 나서 칼을 다시 크게 들었다.

쓰러진 기사 뒤에 있던 세지타는 깜짝 놀라 뒤로 피하려 했지만, 가리온은 빨랐다.

가리온의 검이 에바가 입은 것과 같은 가죽 질감을 끊고 세지타의 살과 뼈를 파고들었다.

“아….”

에바의 입술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쿵.

세지타족은 땅 위로 쓰러졌다.

에바는 입을 손으로 가렸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리온은 차가운 얼음이었다. 아니, 얼음보다 더 차가웠다.

냉정하다는 세지타족보다도 더 냉랭한 모습이었다.

“믿을 수 없어….”

가리온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세지타든 뭐든, 적이었다.

가리온은 다른 적들을 해치우기 위해 달려갔고, 에바는 쏟아지는 적들에게서 가리온을 엄호해야했다.

그렇지만 에바는 가리온 곁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런 모습의 가리온에게는 갈 수가 없었다.

아발론 섬에서 룸바르트가 손을 잡아 끌었던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리온과 많은 것을 함께 생각하고 공유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멀어진 기분이었다.

어쩌면 가리온은 처음부터 먼 사람이었는지도 몰랐다.

에바에게 가리온은 친절하지 않았다. 가리온은 자신을 잘 드러낸 적이 없었다. 늘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인색했고, 가까워졌는가 싶으면 또 멀리 있었다.

그러면서도 에바는 가리온을 마음에 담아두었고, 스스로 가리온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지금 에바는 처음으로 그런 자신의 결정을 후회해야 할까,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너답지 않게.”

“룸바르트.”

룸바르트는 알기가 쉬웠다.

아리송한 말만 했지만 어린 아이가 앙탈을 부리는 것처럼 반대로 말하는 것뿐이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법을 잘못 알고 있었을 뿐, 사실은 가리온보다 편했다.

“한 곳만 바라본다며?”

에바는 룸바르트를 노려보다가 화살을 튕겼다.

에바는 활을 튕겨내고 다시 끌어올리는 그 반복이 스스로에게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에바만 싸우기 힘든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비단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불리한 머릿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리온을 제외하고는 모두 에바처럼 느끼고 있었다.

동료라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싸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목숨을 그냥 내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어. 싸워야 해."

그러나 칸은 캄비라 바투와 함께 싸우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오빠를 죽이려 한 저 괴물을 받아들이는 거죠?”

칸이 항의 했지만, 누구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없었다.

불덩이들이 쏟아지고 땅에서 불꽃이 튀고 있었다. 일의 잘잘못을 따질만한 여유는 누구에게도 없었다.

“난 같이 싸울 수 없어요!”

칸은 소리쳤지만, 잔바크 그레이의 대답은 싸늘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어리군.”

“그게. 그게 무슨 뜻이죠?”

“지금 살아남지 못하면, 네 오빠도 곧 죽을 거다.”

“어떻게 그런 말을! 오빠는 잔바크, 당신을 믿고 여기까지!”

“스스로 결정해서 제노아를 떠났던 것 아닌가?”

칸은 대꾸할 말을 잊었다.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칸….”

시리엘이 칸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 못 싸우겠어.”

칸은 눈물을 흘렸다. 제노아를 떠난 후 처음 흘린 눈물이었다.

“못 싸우겠어.”

“괜찮아.”

시리엘은 칸을 위로해주려 애썼다.

“우리는 저 곳으로 가자.”

헤이치 페드론은 시리엘과 칸에게 말했다.

“저 요새에라도 도움을 청해봐야지.”

칸은 눈물을 거두고 파그노를 보았다.

“물론, 파그노도 데리고 가야지.”

시리엘은 칸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 주었다.

“가서 도움을 청하자.”

“….”

칸은 얼른 등을 돌리고 파그노를 부축해 일어섰다.

캄비라 바투가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싸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캄비라 바투는 다른 것에 신경 쓸 틈을 주지 않았다.

거대한 팔과 다리로 성큼성큼 적들을 들쳐내면서도, 시에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에나가 조금이라도 다칠 까봐 눈을 떼지 못한 것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보호였지만, 그 눈빛마저도 익숙한 듯 시에나는 방어 마법을 펼치는 것에만 집중했다.

일행에게 달려드는 숫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잘 싸우는 것만으로는 힘들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싸울 수 있는 방어막을 시에나가 만들어 주고 있었다.

에바는 그런 시에나를 멍하니 보았다.

제대로 싸우기를 포기한 자신과 달리 너무도 침착해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싸울 수 있지?”

“그게 인카르의 전령이지.”

룸바르트가 대답했다.

에바는 가리온도 같은 말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리온과 닮았어….’

어쩐지 시에나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는 듯 느껴졌다.

그 순간 방어막이 뚫렸다.

"역시 마법사 하나로는 역부족인가!"

룸바르트의 외침이 가까이에서 들렸고, 시에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엇!”

에바가 방금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을 뱉기도 전에, 몸이 먼저 고통을 느꼈다.

시에나가 펼쳤던 방어막이 사라지자 방어선도 깨졌다.

방어막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했던 무리들은 맨 앞에서 싸우던 가리온을 향해 쏟아져 내려왔다. 걸러지던 주문들은 또 다시 불덩이와 얼음이 되어 날아 들었고, 화살들이 빗발쳤다.

“가리온!”

“시에나!”

에바가 가리온을 간절히 부르는 것처럼 캄비라 바투도 시에나의 이름을 외쳤다.

캄비라 바투는 눈앞에서 시에나가 사라지자 미친 것처럼 날뛰었다.

적당히 싸우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졌고, 데카론들 사이로 끌려간 시에나를 되찾으려 애썼다.

“난 이쪽을 터볼 테니까, 너희들은 저기로 돌아서 찾아봐!”

캄비라 바투는 얼마 남지 않은 바기족 전사들을 모두 보냈다.

캄비라 바투의 도끼날이 허공을 휙휙 날았다.

마음이 조급했다. 앞에 있는 적은 많았지만, 아군의 숫자는 적었다.

그렇지만 급한 마음은 허점과 실수가 되었다.

데카론들은 캄비라 바투의 몸에 피 섞인 흠집을 내었다.

당황한 캄비라 바투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래도 눈은 계속 멀리 있었다. 시에나의 모습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자리를 지켜!”

“찾아야 해…”

“알고 있어!”

가리온은 캄비라 바투의 옆에 붙었다.

“시에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해.”

캄비라 바투는 그제서야 가리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

캄비라 바투는 적이었다. 파그노의 어깨에 도끼를 꽂았다.

그러나 가리온은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캄비라 바투를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 또한 시에나에게 용서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싸우자.”

진심이었다.

등 뒤는 캄비라 바투에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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