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bivalence - 타인과 적 - 3장. The soothsayer. 누트 샤인이 만난 예언자
| 21.01.20 12:00 | 조회수: 1,435


탈진하고 난 후의 기분이었다.

묵직한 무언가에 짓눌리다가 그것이 사라져버린 후에 남은 상실감과 왠지 모를 허전함.

“… 죽겠군.”

누트 샤인은 눈을 깜빡이고 깜빡였다.

“죽은 건가?”

눈을 깜빡여도 여전히 어둠만 존재했기 때문에 누트 샤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안돼!”

누트 샤인은 얼른 가슴 복판에 손을 대보았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숨을 쉬고 있었다.

“하아…. 하아…. 큭. 크큭.”

누트 샤인은 피식 웃었다.

지옥 같은 곳에 와서 죽을 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실실 웃던 누트 샤인은 배를 움켜 쥐었다.

“컥. 커억.”

배꼽이 등허리까지 쑥 빠져들어가는 듯 하더니 가슴이 꽉 막혔다. 내장이고 뭐고 몸을 돌던 모든 것이 울컥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쿠웨엑.”

누트 샤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사방에서 진동하는 비린내를 눈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 몸을 마비시키는 비린내가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욱! 우욱!”

눈물이 핑 고였다.

흐려진 눈가에는 그림이 빙빙 돌았다.

붉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노란 것, 그것은 마치 타오르는 횃불 같았다. 그 뒤로 횃불의 그림자에 얼룩진 얼굴이 있었다.

“누구야….”

누트 샤인은 젊은 여자의 얼굴을 헤아리면서 힘겹게 말했다.

여자는 입을 열었다. 누트 샤인의 말에 대답하려는 모양이었다. 그 때 마침 불꽃이 튀어서 여자의 얼굴이 타닥 반짝거렸다.

“바루나.”

“바루나….”

누트 샤인은 눈이 따끔거려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바루나….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데….”

누트 샤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잿빛 천장에는 불 그림자가 찬 공기를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고꾸라졌었는데….”

“뒤척이더니 다시 제대로 눕던걸.”

“그랬군…. 응?”

누트 샤인은 대답하는 여자의 목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여자는 웃더니 고개를 숙여 사람의 머리만한 구슬을 바라보았다.

불꽃에 아른거리던 젊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바루나…!”

여자의 이름을 부르고 나자, 여자는 온전한 인간이고 자신은 바기족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누트 샤인은 자기를 내려다봤다.

누더기 망토는 그대로였는데 무언가 달라졌다. 누트 샤인은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손을 가만히 펴 본 누트 샤인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손 안에는 노라크 동굴에서 얻은 유물이 제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세게 쥐었는지 유물 모양 그대로 손도장이 찍혔다.

손바닥을 다시 쥐려 할 때야 누트 샤인은 알아차렸다.

“하나가 더 있어…!”

“그래요?”

무심코 말을 뱉었던 누트 샤인은 바루나라는 여자의 존재를 다시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간의 현기증이 괴로웠지만 이곳에 더 있는 것은 좋지 않은 듯 했다.

서둘러 돌아서다가 한 가지만 묻기로 했다.

“여기가 어디지?”

“바루나의 집.”

여자는 대답하고 나서 재미난 듯 깔깔거렸다.

그러나 누트 샤인은 장난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지명! 이곳의 지명 말이다!”

여자는 웃음을 뚝 그쳤다.

“제 발로 온 주제에 그것도 몰라?”

“뭐라고?”

누트 샤인은 소리치며 돌아섰지만 여자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여기까지는 내가 데리고 왔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물론 내가 데리고 오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어. 가끔 있는 일이지만, 구슬이 자꾸 시켜서 어쩔 수가 없었지.”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앞의 구슬을 어루만졌다.

누트 샤인은 그걸 지켜 보다가 주위로 시선을 옮겼다.

벽면에는 불꽃에 거슬린 듯, 낡았지만 촘촘한 붉은색 벨벳 휘장이 고깔 모양으로 천장까지 이어졌는데 휘장에는 금색 술과 반짝거리는 구슬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누트 샤인이 누웠을 때 보았던 천정도 그슬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불에 그슬렸기 보다는 습기 때문에 얼룩이 진 것 같았다.

휘장의 끝 자락은 볼 수 없었다. 벌레가 먹었는지 구멍이 총총히 난 붉은 융단 가장자리에 자물쇠가 채워진 나무 상자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나무 상자들 역시 검은 얼룩에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상자들 위에는 양초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그 양초들 덕분에 사방이 거뭇해진 듯 했다.

누트 샤인이 보기에 이 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자들과 같은 색의 원형 책상 위에 놓인, 촛불에 둘러싸인 큰 구슬뿐이었다.

“이제야 알겠어.”

휘장과 같은 질감의 파란 천을 두른 여자는 누트 샤인이 눈치채기를 오래 기다렸는지 눈을 깜빡였다.

“점쟁이 바루나.”

“예언자.”

“여기는 크레스포군.”

“예언자라고 해.”

“나는 다시 밖으로 나온 것이군.”

“점쟁이가 아니야.”

서로 다른 말을 했지만, 누트 샤인은 바루나에게 관심이 생겼다.

“내가 어떻게 밖으로 나왔지?”

손을 꽉 쥐어 본 누트 샤인은 질문을 하나 더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구슬이 자꾸 시켰어. 좀 귀찮아야지.”

“그게 아니야!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

바루나는 말하기 싫은 것처럼 구슬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입을 비죽 내밀었다. 얼굴이 반으로 나뉘어 이마와 갈색 눈동자가 얼룩덜룩 해졌다.

누트 샤인은 밖으로 나가서 기척을 살핀 뒤 다시 돌아왔다.

“얼른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누트 샤인은 바루나의 등 뒤에 서서, 촉수로 목을 감았다.

“킥. 예언자는 영원히 젊으며, 또한 죽지도 않지.”

바루나는 얼룩이 진 얼굴을 누트 샤인에게 돌리며 오히려 웃었다.

“죽여봐.”

촉수가 바루나의 목을 죄려는 순간, 구슬이 빛을 발했다.

그것은 불꽃 같았다. 구슬의 매끈한 표면을 화르륵 감싼 하얗고 푸른 불꽃이었다.

누트 샤인은 불꽃보다도 바루나에게 놀랐다. 누트 샤인이 촉수로 감싼 목이 돌처럼 바싹 굳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바루나는 말을 시작했다.

“아발론에서 태어난 자의 전언.”

바루나의 목이 뻣뻣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이전의 시대에 세라피와 피를 나눈 자들이 충실한 하인을 돕고 있으니 영광으로 받들어 신이 그대를 위해 꾸며놓은 길을 따르라.”

쇠를 긁는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더니 구슬과 같은 빛깔의 눈이 된 바루나가 누트 샤인을 보며 다정히 말했다.

“열쇠를 지닌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신들의 도시로 가세요. 그들을 만나면 안 되요. 대륙이 위험해질 거예요. 당신은 막아야 해요. 모두들 모르고 있어요. 당신뿐이에요.”

“리… 리엘…?”

“조각들을 깊숙이 숨겨요. 그 분을 만나기 전에. 그 분이 당신을 찾아가기 전에!”

“리엘!”

“이번만큼은. 이번…. 제…. 말….”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누트 샤인은 또 한 번 깜짝 놀라야 했다.

바루나의 목소리가 또 바뀌어서였다.

“왜 이렇게 사연이 많은 거지? 시간이 없다면서! 다 이야기해 줄 수 없다는 것쯤은 알잖아! 이제 그만 볶아! 뭐? 좋아. 이제 마지막이야. 나도 더는 어쩔 수 없어. 리엘이 너무 많이 이야기했어.”

그렇지만 누트 샤인은 리엘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소리쳤다.

“아니! 리엘을 부탁해!”

누트 샤인은 자신에게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바루나는 씩 웃었다.

낯설지만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가 퍼졌다.

“돌아가. 내일 아침에 유물에 적힌 곳으로 가. 그러면 진실을 알게 될 거야.”

말이 끝나자마자 누트 샤인의 몸이 밖으로 튕겨지더니 문이 닫혔다.

누트 샤인은 다시 들어가려 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인 누트 샤인은 뒤를 돌아 뛰어갔다. 온 몸에 자신을 야금 갉아먹는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과거를 돌려 본 누트 샤인은, 지금도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잡힐 것 같은 데 잡히지 않는 아슬아슬한 느낌.

“크레스포에서 바루나라는 예언자를 만났지. 내가 진실을 알게 된다고 말했어. 신의 길을 따라가면. 알게 될 것이라고. 사실 바루나가 무엇을 알고 이야기한 것은 아니겠지만.”

흰 옷을 입은 자는 누트 샤인의 말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나는 그래서 여기. 바라트에 왔고.”

누트 샤인은 흰 옷을 입은 자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그 자리는. 운도 마조키에의 자리였지.”

“역시 잘 알고 있군.”

누트 샤인은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지만 그는 흥미로워 했다. 정답은 계속 잡히지 않았고 허공을 돌고 있었다.

그때 리엘의 말이 떠올랐다.

“가만.”

흰 옷을 입은 자도 누트 샤인이 하려는 말인지 궁금해 눈을 찡긋했다.

“가만. 가만.”

누트 샤인은 운도 마조키에의 자리와 칼리지오 밧슈의 자리를 번갈아 보았다.

“리엘은…..”

누트 샤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드디어 무언가를 잡았다는 느낌이 확실히 전해졌다.

“사람. 아니, 사람들, 이라고 했어.”

누트 샤인은 흰 옷을 입은 자의 안색이 불안하게 바뀌는 것을 감지했다.

“열쇠를 지닌 사람들….”

누트 샤인은 마구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그래! 열쇠를 지닌 사람들!”

그리고 웃음을 뚝 그쳤다. 그 모습이 꼭 여러 목소리로 말을 전하던 바루나 같았다.

“그래. 가리온. 가리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가리온이 크레스포에 가는 거야.”

흰 옷을 입은 자가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기 전에 누트 샤인이 마저 말했다.

“아아… 가리온. 칼리지오 밧슈 놈의 자손이 가리온뿐만이 아니지. 그렇지. 그래. 가리온뿐만이 아니야.

누트 샤인은 손에 쥔 유물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열쇠…. 가리온이 열쇠를 가지고 있나?”

누트 샤인은 예리한 듯 질문을 던졌지만, 이 질문에 흰 옷을 입은 자의 안색은 한 번 더 바뀌었다. 그 여유로운 안색으로 흰 옷을 입은 자는 대답했다.

“아니. 그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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