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 테라클은 살며시 문을 닫고 나왔다.
방금 전 아무래도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 같았다.
그 방은 몹시 중요한 방일 텐데, 여타의 방처럼 세워둔 경비가 없었다.
사실 인카르 신전이 황폐해진 지금은 그 편이 안전했다. 경비가 있다면 오히려 눈에 더 띄었을 것이었다. 아이언 테라클은 바로 그 점 때문에 비나엘르 파라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대담한 여자야. 하지만 왜?”
그래도 신전 안에서 가장 보안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아이언 테라클은 방금 전 보았던 것을 다시 떠올렸다.
그가 그 방을 보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전과 달리 이계의 세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비나엘르 파라이의 모습은 몹시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트리에스테 대륙을 가장 소중하게 대했던 것은 듀스 마블이라 할 수 있었다. 사죄의식이 있기 전, 제 2의 그랜드 폴이 터질 것을 두려워한 것은 듀스 마블 뿐이었다.
몇몇 조디악들이 듀스 마블에게 동조하여 걱정스러워한 듯 했으나 그들은 비나엘르 파라이를 믿고 있었다. 트리에스테 대륙을 걱정하기 이전에 방주 아르카나라는 든든한 보호막이 있음을 다행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이런 면은 비나엘르 파라이도 마찬가지였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대재앙이 다시 발생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근심 따위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트리에스테 대륙을 전부 쑤시고 다니는지 늘 인카르 신전에 없었고 비밀도 제일 많았다.
때문에 사죄의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데카론을 조직하여 크레스포로 보낸 비나엘르 파라이의 꿍꿍이가 궁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언 테라클은 비나엘르 파라이의 뒤를 밟았던 것이다.
아이언 테라클은 비나엘르 파라이와 일부러 마주쳤다.
스쳐 지나가는 듯 인사도 했다.
인기척이 남아 있어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아이언 테라클에게 미소로 인사하며 걸어갔다.
‘좋아. 뒤를 밟자.’
오전의 햇살이 가득 담긴 인카르 신전의 복도를 따라 아이언 테라클은 살금 걸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볍게 발을 끌며 흥얼거렸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지?’
신발 끄는 소리를 화살표 삼아 간격을 두었던 아이언 테라클은 어느 순간 발소리가 멈추는 것을 듣고 우뚝 멈추어 버렸다.
‘들켰나?’
순간 아이언 테라클의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아니, 아냐. 이리로 들어가면 막다른 골목이야. 방은 단 한 개인!’
아이언 테라클이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채 전에, 다시 발 끄는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그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가까워지고 있어!’
아이언 테라클은 얼른 옆 방으로 숨어서 발 끄는 소리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쿵쾅거리는 마음에 신경이 곤두섰고, 식은땀이 흘렀다.
잠시 후, 아이언 테라클은 기름이 잔뜩 낀 얼굴을 문밖으로 내밀었다.
오전의 햇살은 방금 전보다 뜨거워져 있었고, 복도는 먼지 날리는 소리도 없이 조용했다.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진 아이언 테라클은 비나엘르 파라이가 갔던 곳으로 걸어갔다.
‘이 방은….’
예전에 듀스 마블이 조디악이 되기 전에 썼다는 방이 눈앞에 있었다.
듀스 마블이 조디악도 되고 대변인도 되었기 때문에, 젊은 인카르의 사제들은 이방을 서로 쓰려고 안달을 했었다. 인카르 신전을 방문한 귀족들이 성지처럼 들리는 명소이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뭘 한 거지?’
아이언 테라클은 뒤를 돌아 주위를 다시 확인했다. 방금 전에 걸어온 길이었는데도 한참을 지나가지 않은 길인 듯 낯설고 차갑게 다가왔다.
“후….”
긴장된 숨을 들이키고 살며시 손잡이를 밀었다.
눈은 이제 보게 될 광경이 궁금해 커다랗게 흔들리고 있었고, 귀는 주위를 의심하느라 흔들렸다.
‘과연?’
문이 살짝 열리면서 삐걱, 소리가 났다.
아이언 테라클은 아차 싶었지만 곧 그 일을 별로 염려하지 않게 되었다. ‘이건…!’
방안에는 밀랍 인형처럼 보이는 사람의 형상이 여럿 세워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이언 테라클이 아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아이언 테라클이 죽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도 있었다.
정지한 채 서 있는 밀랍 인형은 모두 듀스 마블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던 조디악들이었다. 아이언 테라클은 처음에는 그들이 살아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었다. 하지만 그들은 밀랍인형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들 앞에 다가가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제서야 아이언 테라클은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다만 그들의 발그레한 볼과 무엇인가에 열중했던 듯한 눈의 표정이 꼭 방금 전까지도 살아 있었던 것처럼 보여 마음에 걸렸다.
그 다음으로 본 것은 눕혀져 있는 두 사람이었다.
아이언 테라클은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이언 테라클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아이언 테라클은 지금껏 조심스럽게 행동했던 것도 있고, 크게 소리 칠뻔했다.
“이럴 수가!”
단 한마디만 뱉고 얼른 입으로 손을 막았다.
방안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고, 항상 그랬던 대로였다.
천장에는 방주 아르카나의 모습이 재현된 천장화가 그려져 있었고, 사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침실은 아주 작은 편이었는데, 응접실의 반만한 크기로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는 표시로 문이 열려 있었다. 벽에는 비나엘르 파라이의 초상화와 듀스 마블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고, 인카르의 12신이 그려진 푸른 깔개 위에 듀스 마블이 즐겨 앉았다는 붉은 색으로 휘감은 긴 의자가 같은 빛깔의 원목으로 만들어진 원형 탁자 주위에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아이언 테라클이 그들을 발견한 것은 바로 긴 의자 위였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아이언 테라클은 한 명은 얼굴만 훑었고, 다른 한 명은 가까이 가서 보았다.
“자네가 어떻게…!”
아이언 테라클은 의자 옆에 주저 앉아 듀스 마블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희멀건 했던 듀스 마블의 얼굴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붉었다.
‘왜 비나엘르 파라이님은?’
아이언 테라클은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하다가 탁자 위에 놓인 세 통의 편지를 보았다.
그 위에는 아이언 테라클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이름과 생각지도 못했던 두 사람의 이름이 각각 쓰여져 있었다. 아이언 테라클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이리스 비노쉬였고, 깜짝 놀랄만한 다른 두 사람은 누트 샤인과 아모르 쥬디어스로부터 온 편지였다.
아이언 테라클은 망설이다가 사라진 조디악 아모르 쥬디어스의 편지를 펼쳐 보았다.
비나엘르 파라이! 성스러운 딸이여!
오랜만이군.
아니, 내가 인카르 신전을 떠난 뒤 처음인가?
백기사단의 일은 나를 오랫동안 괴롭혀 왔네.
나는 떠날 수 밖에 없었지. 1분, 1초라도 더 견딜 수가 없었네.
그러나 당신과, 슈마트라 초이, 운도 마조키에가 힘들게 지켜낸 이 불멸의 대륙에 대한 걱정은 변함이 없네. 그 마음만은 여전히 너무 강직한 나머지, 이렇게 몇 자 적게 되었지.
그렇다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나는 데네브에 있었네. 물론, 지금은 그곳이 아니네.
나는 데네브에서 아르데코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누굴 만나게 되었지. 그는 나처럼 저주를 받았는지, 평범한 모습의 사람은 아니었어. 심상치 않은 독한 기운이 온몸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지.
그런데 말이야. 진실로 그러했다네. 그는 저주 받을 만한 짓을 벌이고 있었다네.
그의 이름은 누트 샤인!
기억하겠나? 그는 알로켄족의 마지막 서기관이었지. 그리고 바기족의 족장이기도 하네. 그는 매우 영리한 인물일세. 또한 신념이 있기도 하지. 그러나 그의 신념은 잘못된 것이라네.
그런 신념을 트리에스테 대륙을 위해 썼으면 좋았을 것을!
어쨌든 지금 그는 정확하게 방위를 따르고 있네. 이대로 가면 봉인의 지점도 찾아낼 것이야.
아. 물론, 나는 그를 막고자 했네.
나는 데네브에서 크레스포까지 신분을 위장하고 따라갔었네.
그가 미심쩍기는 했지만, 그 때는 정확한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었지.
물론 데네브에서 그가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지침서를 가진 듯 해 보였지만, 나는 그것에 관해 정확히 알지 못했네.
자네는 아는가?
그럴 거라 생각하며 그것에 관해 몇 자 적겠네.
그것은 아까 말했듯이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져 있었네. 그 오리하르콘은 트리에스테 대륙의 모양을 하고 있었지. 내가 본 면에는 “크레스포”라고 써있었네. 다른 한 면도 마저 보려고 했지만 그것에는 실패했네. 무엇인지 알겠는가?
누트 샤인은 그것에 써 있던대로 크레스포로 갔네. 그것이 우연의 일치 같지는 않으니 알아봐주게. 트리에스테 대륙을 위한 일이지 않은가!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인간들은 알로켄에게나 이계에게나 소중한 존재들이네.
크레스포에서 그는 갑자기 나의 정체를 알아채버렸네.
그리고 내 몸에 독기를 불어넣었지. 순식간이었어.
아.... 이제는 예전의 검신이라는 이름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네. 서글퍼지는군.
어쨌든 나는 그가 크레스포 다음에 어디로 가려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따라갈 생각이네.
그는 바라트로 갈 것이네. 엘타에서 배를 구했다는 소문을 들었지.
아마 크레스포에 벌어진 이계의 틈에서 트리에스테 대륙 모양으로 생긴 오리하르콘 조각을 찾았을 거야. 거기에는 “바라트”라고 써 있겠지.
그가 바라트로 가는 것은 좋지 않네.
자네도 알지 않은가? 우리가 그 동안 바라트에 사람들의 발길을 끊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바라트는 위험하네. 나는 서둘러 그를 쫓아가 막도록 하겠네.
지금은 엘타라네. 자네가 편지를 받고, 다시 답장을 쓰는 동안이면 나는 페니키로 이동하겠군.
편지는 그 편에 부쳐주게.
그 동안 나는 “클로비스”라는 이름을 쓰겠네.
그 자가 클로비스의 이름을 쓰고 있더군. 나는 그래서 처음부터 그가 클로비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지.
헬리시타는 어떤가? 클로비스도 잘 있는가? 파르카 신전에 들렀더니 그는 떠났더군. 참으로 방랑기가 많은 사람이야.
아아. 이 밖에도 궁금한 것이 많지만, 나는 인카르를 떠난 사람이니 더 묻지 않겠네.
144.12.1
검신 아모르 쥬디어스
아이언 테라클은 기가 막혔다.
아모르 쥬디어스가 사라진 백기사단의 일과, 비나엘르 파라이와 아이리스 비노쉬가 바기족을 바라트로 보내려 했던 일과, 클로비스라는 새로운 중요 인물이 있다는 일.
타박.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경비병의 발걸음 소리에 아이언 테라클은 편지를 품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신중하자. 신중하게 행동하자.’
아이언 테라클은 우선 자신이 몰랐던 사실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남은 두 개의 편지에 대해서도 차차 보기로 했다.
머리는 나중에 치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