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orak - 이교도의 유물 - 7장. Ominous. 불길한 징조
| 20.12.16 12:00 | 조회수: 1,327


"아직은 이르오."

"그 때 말씀하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때가 좋지 않다니까요."

"저희들은 이번 일이 오히려 인카르를 돕는 방도라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인카르의 군대는 2배, 3배, 아니 몇 천 배 까지 늘릴 수 있습니다. 이번이 기회 아닙니까?"

"휴우. 요쉬마, 헤이치. 난 두 분을 돕고 싶고, 실제로 돕고 있습니다. 이 듀스 마블도 조디악 회의를 통해 소환 마법과 조련술을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번 조디악 회의에서는 다른 중요한 사안들이."

"인카르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지금 크레스포로부터 계속해서 오염이 퍼지고 있습니다!"

"요쉬마. 진정해."

"그래요. 요쉬마. 조디악인 내가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끼어드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자중하는 것이 어떨지. 게다가 조디악도 아닌 당신들이 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던가요? 흐흐 음……."

적색 빛이 감도는 갈색 책상 앞에 앉은 듀스 마블은 거만한 표정으로 요쉬마를 나무랐다. 조그마한 창으로부터 들어 온 빛이 책상과 같은 빛깔의 카펫을 비추고 있었다. 책상이 놓여진 쪽의 벽면에는 역시 거만한 표정의 듀스 마블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한 사람이 쓸 방 치고는 엄청나게 넓은 듀스 마블의 집무실이었다. 방 가운데 버티고 선 깡마른 체격의 요쉬마는 곱슬머리를 흔들면서 씩씩거렸고, 큰 키의 헤이치는 듀스 마블의 표정을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요쉬마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요쉬마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슈마트라 초이입니다."

"아이쿠, 기사계의 검성이 오셨군.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난 이만 조디악 회의에 가야겠소.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하도록 하십시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억울한 요쉬마의 목소리에 듀스 마블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으허허……. 이젠 이 듀스 마블의 지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가 보군요?"

이 말에 요쉬마와 헤이치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입이 굳어버린 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버렸다. 인카르에서 합법적인 마법으로 인정 받지 못한 소환술과 조련술을 여태껏 뒤에서 후원해 준 듀스 마블이었다. 그가 당장이라도 지원을 멈춰버리면, 합법화는커녕 더 이상의 연구도 불가능하게 될 터였다.

듀스 마블은 혀를 끌끌 차며 조디악 대변인의 집무실을 나섰다. 요시마와 헤이치는 듀스 마블의 등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듀스 마블의 집무실에 연결되어 있는 비밀스러운 문으로 사라졌다.

방에서 나와 순식간에 얼굴 표정을 바꾼 듀스 마블이 집무실의 문을 단단히 닫은 뒤, 슈마트라 초이를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헬리시타까지 오시느라 힘든 걸음 하셨겠습니다. 그런데도 집무실로 바로 모시지도 못하고 죄송하군요. 허허."

"천만에요. 괜찮습니다.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늘 인카르 신전에서 고민거리만 잔뜩 안고 살아가지요. 밖에서 좋은 공기라도 마시고 싶은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허허."

"밖에도 오염체들이 나타나 꽤 소란스럽습니다. 저는 오히려 여기 인카르 신전에 있는 듀스 마블님이 부럽습니다."

듀스 마블은 너그럽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놈 봐라. 네가 조디악에 들어오고 싶단 말을 꺼내려는 게냐. 흥. 기사면 기사로서 뼈를 묻을 것이지. 혈통도 확실하지 않은 놈이.'

"그런데, 얼마 전에 브라이켄 성에 다녀가셨다는 소문이 들리던데요?" 슈마트라 초이는 듀스 마블의 속마음을 전혀 모른 채 말을 이어나갔다. "허허. 이런. 예. 갔었습니다. 소문이 빠르시군요. 오염체가 다시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시점에, 조디악으로서 아무래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어서 말이지요."

"그러셨군요. 역시 듀스 마블님입니다."

"사실, 이번에 파견된 청기사단이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을지 걱정도 되고……. 저도 젊었을 때는 밖에 나가서 마음껏 기량을 펼쳐보기도 했는데. 지금은 인재가 있는지 없는지……. 허허."

듀스 마블의 이 말에 슈마트라 초이는 기분이 상했다. 듀스 마블은 은근히 청기사단을 깔보고 있었다. 그래도 슈마트라 초이는 잠자코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조디악이 되려면, 듀스 마블의 편에 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인카르에서 듀스 마블은 곧 출세의 지름길을 의미했다. 이미 열 두 명의 조디악 중 아홉 명이 듀스 마블과 손을 잡았고, 얼마 전에는 인카르 대변인의 자리도 거머쥐었다. 듀스 마블은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참. 자제분도 이번에 원정을 떠났다지요?"

"예. 변변치 않지만, 가리온이라고 아들놈이 하나 있지요."

슈마트라 초이는 가리온이 기사단에 입단하던 날이 떠올라, 잠시 감회에 젖었다. 남남처럼 생각했던 가리온이었지만, 그래도 가리온은 슈마트라 초이의 아들이었다.

"허허. 우리 인카르의 청기사단에 들어갔는데 인재가 아니라니요. 지나친 겸손이십니다."

듀스 마블과 슈마트라 초이는 인카르 신전의 밝은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들었다. 통로 안쪽에 걸려있는 번득이는 칼날, 날카로운 창 끝이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통로 바깥쪽은 화사한 꽃들이 만발한 파라다이스였다.

새하얀 돌 자갈길 옆으로는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었고 분수에서 뿜어지는 물보라는 햇빛을 받아 산산이 부서지며 반짝였다. 다채로운 색으로 피어난 꽃들의 살랑거리는 모습, 코 끝을 간질이는 달짝지근한 공기의 냄새도 트리에스테에서 가장 평화롭고 안정적이라는 헬리시타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인카르 덕분에 헬리시타는 많이 안정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그런 말을 들으니, 안에서 고민만 한 것도 보람되게 느껴지는군요."

"저희 제노아도 하루 빨리 안정이 되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 번 제노아를……."

슈마트라 초이는 회의실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듀스 마블에게 은근히 야욕을 드러냈다. 마법계가 인카르와 트리에스테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시점에서,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기사계가 조디악을 장악해야 했다.

지금의 기사계는 전혀 정리되지 못한 상태였다. 운도 마조키에가 그랜드 폴로 사망한 후, 제대로 된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물론, 아이언 테라클이 기사계 대표로 조디악의 일원이기는 했지만, 그는 기사계에서 전혀 인정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기사계에서 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슈마트라 자신이 조디악이 되고 또 시발점이 되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슈마트라 초이는 마법계의 신관들이 굉장히 영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성급하게 먼저 조디악을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기사들의 도시 제노아를 우선 평정한 다음 인카르에 입성하길 기대한 것이었다.

"인카르의 영웅인 검성께서, 그런 걱정을 하시다니……. 갑자기 제가 할 일 없는 늙은이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군요."

듀스 마블은 슈마트라 초이의 욕심을 읽고, 슬슬 돌려가며 이야기를 풀었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기사계의 상황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운도 마조키에의 직속 후계자 아이언 테라클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터라……. 기사계를 위한 다른 묘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이 말에 슈마트라 초이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아이언 테라클을 비판하면서, 그랜드 폴 당시 인간들과 트리에스테를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전설적 인물 운도 마조키에도 같이 깎아 내리는 듯한 듀스 마블의 말투가 슈마트라 초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아이언 테라클은 카시미르 산맥 서쪽에 대규모 광맥을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사람이었다. 인카르에서는 조사 결과 광맥을 발견한 떠돌이 기사 아이언 테라클이 전설의 기사 운도 마조키에의 직속 후계자라고 밝혔다.

이런 이유로 아이언 테라클은 인카르의 1대 청기사 검신 아모르 쥬디어스에게 교육을 받게 되었고, 그 후 인카르에서 기사계의 조디악으로서 임명되었다.

그러나 막상 기사계에서는 그를 진정한 기사로서, 또 조디악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인카르로부터 임명되었다는 것 자체가 기사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아이언 테라클이 정말 운도 마조키에의 후예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정통성이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기사계에서 아이언 테라클은 발을 붙이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그래도 타고난 제련 솜씨와 재담으로 제노아에서 추방당하는 것만은 겨우 면하고 대장장이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이후, 기사계는 계속해서 아이언 테라클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로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슈마트라 초이도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이 기사계의 일인자가 되어 제노아를 이끌고 싶었다.

"기사계는 워낙 정통성을 중요시하는 곳이라 말이지요……."

"기사계도 많이 변했습니다."

"그래요? 그거 잘 되었군요. 허허허."

“그리고 지난번의…….”

화단이 끝나는 곳에서 높게 솟구치는 분수가 보이자, 듀스 마블이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이만, 회의에 들어가야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슈마트라 초이는 어쩔 수 없이 하고 싶었던 말을 끊어야만 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듀스 마블이 몸을 돌리자, 인카르의 문장이 순금으로 새겨진 하얀 문 옆에 서 있던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역시 순금으로 만들어진 손잡이를 돌려 회의장 문을 열고 허리를 굽혔다. 슈마트라 초이도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부탁 드립니다."

몸을 숙인 슈마트라 초이의 코 앞에서 문이 닫히자 슈마트라 초이는 그제서야 다시 고개를 들었다. 금색 휘장이 눈부신 하얗고 거대한 문을 노려보았다. 정중하게 부탁은 했지만, 듀스 마블은 아무래도 믿기 힘든 인물이었다.

"자네가 여기 웬일인가?"

슈마트라 초이가 돌아보자, 등이 굽은 아이언 테라클이 눈알을 부라리며 서 있었다. 오랜 대장장이 일로 구부정한 자세의 아이언 테라클은 가무잡잡한 얼굴이 온통 기름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래도 도저히 100살이 넘은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외모였다.

"제가 오지 못할 곳이 아닙니다."

슈마트라 초이는 아이언 테라클의 말을 되받아 넘겼다.

"흥, 그래. 듀스 마블에게 빌붙어서 조디악 자리라도 하나 넘겨받으려나 보지? 흠. 그럴 순 없지. 그렇고 말고."

슈마트라 초이는 여전히 아이언 테라클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린 채 돌아섰다.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아보기 위해 듀스 마블의 집무실 앞에서 기다려 볼 참이었다.

"참! 자네는 이 안으로 못 들어가지? 대장장이인 나도 들어갈 수 있는데. 거 참 안되었군. 아! 또 있지. 자 여기 소개하겠네. 전설의 기사 운도 마조키에의 후손, 나 아이언 테라클을 이을 잔바크 그레이 군이라네. 이 젊은이가 나와 함께 들어갈 거야. 내가 발굴했지."

슈마트라 초이는 짐짓 예의를 갖추는 듯한 몸짓으로 아이언 테라클 옆에 서 있는 젊은이를 훑어보았다.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호남형의 잔바크 그레이가 아이언 테라클의 옆에 당당히 서 있었지만, 슈마트라 초이의 눈에는 잔바크 그레이도 아이언 테라클과 똑같은 쇠기름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둘 다 기름 덩어리인가 보군.'

슈마트라 초이는 이런 생각이 들어 피식 웃어 버렸다.

"잔바크 그레이입니다."

젊은이는 슈마트라 초이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슈마트라 초이는 그 모습이 어쩐지 밉지 않았다. 잔바크 그레이라는 청년의 행동에서 슈마트라 자신을 검성으로 존경하는 심사가 엿보였던 것이다.

'정통성이라…….'

슈마트라 초이는 가볍게 웃으며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화단 길로 다시 돌아가는 슈마트라 초이를 뒤로 하고, 아이언 테라클과 잔바크 그레이는 인카르의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눈부신 문과 달리, 회의장 안은 빛이 전혀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높은 벽 위쪽으로 작은 창이 몇 개쯤 뚫려있어 그것으로나마 사물을 조금씩 구분할 수 있는 정도였다. 햇빛도 별로 들지 않는데다가 진동하는 대리석 냄새가 몹시도 냉랭한 분위기였다.

"트리에스테의 꼴사나운 안정화가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지지."

아이언 테라클은 거대한 인카르 회의실에 들어선 잔바크 그레이가 떨고 있는 듯하자, 한 마디 슬쩍 비꼬았다.

"저 자가 바로, 듀스 마블이야. 인카르의 12신관, 조디악 중에서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여우 같은 마법사라네."

팔각형의 회의장 중앙에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인물이 있었다. 어둑신한 회의장 내부에서도 유난히 돋보이는, 동그란 얼굴의 넉넉해 보이는 사람이 여유롭게 웃으며 서 있었다. 잔바크 그레이의 은색 눈빛이 그를 향했다. 아이언 테라클과 같은 연배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젊어 보이는 듀스 마블이 조디악의 신관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이 인카르의 실세인가.'

잔바크 그레이의 눈빛을 느꼈음인지, 듀스 마블도 아이언 테라클 쪽을 응시했다.

"저기, 대장장이가 왔군."

"쇠만 두드리려니 힘이 부쳤나 보지. 나이깨나 먹었으면 곱게 죽을 것이지."

"그래도 기사들 쪽에서는 꽤 유명하다던데."

"기사들 중에서는 그런가 보지. 우리 인카르에서야 통하겠나?"

"그런가? 얘기가 그렇게 되는구만. 하하하"

"하긴, 제노아같은 시골과, 헬리시타는 천지 차이지. 하하"

듀스 마블 주위에 몰려 있던 마법사들이 아이언 테라클과 잔바크 그레이를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 그 소리가 아이언 테라클이 있는 곳까지 들렸지만, 그는 그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저것들이!"

잔바크 그레이는 울컥한 나머지 허리춤에 찬 검에 손을 얹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신경 쓰지 마라. 저런 것들은 기생충일 뿐이야. 듀스 마블이 없으면 기침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할 쓰레기들이지."

아이언 테라클은 그렇지 않아도 자글자글한 얼굴을 더욱 더 잔뜩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쳐 내야 할 것은 저런 조무래기들이 아니라, 저들의 머리 듀스 마블이다. 그만 없앤다면, 인카르는 물론 트리에스테 전체가 우리 것이 될 것이야.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아이언 테라클과 그 옆의 청년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듀스 마블은 아이언 테라클이 청년을 데리고 나타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변변찮은 녀석.'

아이언 테라클과 듀스 마블은 나란히 아모르 쥬디어스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사이였다. 그러나 아이언 테라클이 기사계에서 힘겹게 살아온 것과 달리, 듀스 마블은 탄탄대로를 걸어왔다. 그래도 인카르를 집어 삼키려는 야망의 크기는 둘 다 만만치 않았다.

듀스 마블은 이번 회의에서 풀어야 할 것들을 머리 속으로 정리하며, 목소리를 높여 회의가 시작될 시간임을 알렸다. 듀스 마블을 둘러싸고 있던 마법사들은 하나 둘 자리에 앉았고, 아이언 테라클과 잔바크 그레이도 끝 쪽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의 회의는……."

"제가 좀 늦었나 보군요."

회의장 중앙이 붉게 빛나면서, 원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잔바크 그레이에게 아이언 테라클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회의장 중앙에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단다. 상위 마법자라면 이 마법진을 이용해 여기를 드나들 수 있지. 이 목소리를 들으니. 누군지 알 것 같구나.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줄 분이야."

붉은 빛이 점차 사라지면서, 여자 마법사와 또 한 사람이 회의장 중앙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 마법사가 걸친 하얀색 오클라스에는 사파이어로 인카르의 무늬가 화려하게 수 놓여져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워 보이는 은발을 쓸어내리며 덧붙였다.

"바람이 너무 좋아 산책을 조금 했더니 이렇게 늦어버렸네요. 여러 신관님들께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고, 듀스 마블. 자네가 진행하고 있었나? 날 좀 기다려주지 그랬어? 원리원칙을 너무 지키는 것도 탈이라니까. 자, 오늘은 내가 진행하도록 하지."

여자 마법사의 말에 여태껏 여유로워 보이기만 하던 듀스 마블의 표정이 순간 질린 것처럼 변하는 듯 했지만, 아무 말 없이 가까운 자리로 가 앉았다. 그녀는 듀스 마블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난 후 밝게 웃으며 다시 한번 원숙한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오늘은 특별히 궁사계의 명궁 아이리스 비노쉬님도 참석해 주셨습니다. 아이리스. 저쪽으로 자리해 주시겠어요?"

여자 마법사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자줏빛 머리채를 날리며 듀스 마블의 옆에 앉았다. 아이리스 비노쉬라 불린 여인은 가죽으로 된 짧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여자라고는 도무지 믿지 못할 만큼의 단단하고 탄력 있는 갈색 몸매가 옷 사이로 드러나면서 야릇한 매력을 풍겼다.

"자아 이제 인카르 신관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인카르 력142년 제 1673회 차. 진행자는 비나엘르 파라이입니다."

그 순간 어디로부터인가 들어온 빛이 어두웠던 회의장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잔바크 그레이는 비로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인카르의 핵심 인사들인 열 두 명의 신관들이 앞자리에 둥글게 모여 있었다. 듀스 마블과 비나엘르 파라이를 포함한 열 명이 마법계의 고위 인사들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방금 도착한 아이리스 비노쉬와 잔바크 그레이 옆에 있던 아이언 테라클이었다.

그리고 열 두 명의 신관, 조디악을 빼고 세 사람이 더 있었다. 잔바크 그레이와 방금 회의의 시작을 선포한 비나엘르 파라이의 말을 옆에서 고개도 한번 들지 않고 열심히 적고만 있는 서기관. 그리고 듀스 마블 근처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얼핏 보기에도 잔바크 그레이와 비슷한 나이로 짐작될 만큼 어려 보였다.

"오늘의 주요 안건은 기사계의 안정과 이를 위해 앞으로 인카르가 나아갈 방향입니다. 이는 트리에스테 대륙의 안정화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이에 대한 의견이 있소."

아이언 테라클이 성급히 입을 열었다. 신관들은 고개를 돌려 아이언 테라클을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실권자 듀스 마블조차도 어쩌지 못하고, 인카르의 모든 사람들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트리에스테의 모든 이로부터 추앙 받고 있는 최고 권력자 비나엘르 파라이는 그런 아이언 테라클을 너그러운 웃음으로 바라보았다.

"기사계의 아이언 테라클. 잠시만 기다려 주겠어요? 아직 제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붉어질 것 같지도 않은 아이언 테라클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는 듯 했지만, 회의장 안은 여전히 잠잠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기사계의 안정은 인카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안건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모처럼 궁사계의 아이리스 비노쉬님께서 함께 자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궁사계의 존망이 달린 긴급한 안건 때문입니다."

도도하기 그지없던 궁사계가 궁여지책으로 인카르를 찾았다는 비나엘르 파라이의 말에 회의장에서는 잠시 웅성거리는 소란이 일었다.

궁사계는 인카르에 대해 그리 협조적이지도, 반대로 적대적이지도 않은 입장을 취해오고 있었다. 트리에스테의 중립적 종족으로서 트리에스테 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네오스에 자리를 잡고 큰 세력을 키워오고 있었던 그들이 인카르에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이 정도의 소란이 있을 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때문에 소란에 동요되지 않고 계속해서 회의를 진행해 나갔다. 명궁 아이리스 비노쉬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의연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첫 번째 안건. 바기족 이주에 관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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