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Testament - 새로운 약속 - 10장. Roa Castle. 역사의 도시
| 21.01.13 12:00 | 조회수: 948


로아 성에 환호 소리가 시끄러웠다. 무언가 사건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귀족들의 마을까지 환호가 들릴 리가 없었다.

“그리폰이군요.”

메리엘 부인이 창가로 가더니 말했다.

“난 그리폰이 별로라오.”

델카도르는 필기하던 것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메리엘 부인은 교양 있게 손을 가리며 높은 음조로 웃었다.

“그래 봤자 그리폰은 델카도르님한테 올 걸요.”

“그래서 더 별로입니다.”

여전히 글을 적어 내려가던 델카도르는 짤막하게 말했다.

“델카도르님은 좀 더 귀족적이셔야 해요.”

메리엘의 카랑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로아성의 집정관이 이렇게 초라한 차림이라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메리엘은 푸른 비단 드레스를 살짝 끌고 델카도르 뒤로 갔다. 델카도르의 진갈색 외투 어깨에 흰 비듬 몇 개가 굴러 다녔다. 메리엘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게다가, 인카르에 협조적이지도 않고.”

메리엘의 긴 얼굴이, 입술을 삐죽거려 더욱 길어졌다.

“귀족이건, 인카르건. 별로입니다.”

델카도르는 입술을 굳게 물어 납작한 얼굴을 더욱 납작하게 만들었다. 핏빛이 별로 없는, 델카도르의 푸른 입술만 살짝 더 붉어졌다.

“트리에스테 대륙은 인카르 교단이 움직여요. 저도 아는 사실을 델카도르님은 왜 외면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메리엘은 연극을 하는 것처럼 표정을 계속 변화시켰다. 이번에는 놀리는 듯한 표정과 경악하는 듯한 표정이 함께 연출됐다.

“그러나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오…. 트리에스테에 대한 연구가 함께 진행되어야 하는데…. 역사의 도시라 해서 왔더니만 이계의 생명체를 제거하라, 이계의 오염체를 제거하라. 제거하라…. 휴…. 저랑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델카도르의 말에 메리엘은 입술을 한 번 더 삐죽 내밀었지만, 곧 표정이 환해졌다. 누군가 전갈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메리엘이 봉투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델카도르에게 전해주는 사이, 인카르 교단에서의 전갈을 전한 그리폰이 헬리시타로 돌아가기 위해 하늘로 올랐다. 하늘로 오르는 그리폰에게 향하는 환호성이 다시 들려왔다. 덕분에 전갈을 받아 든 델카도르의 한숨은 완전히 가려렸다.

“누구예요? 이번엔 또 무슨 일이래요?”

메리엘은 호들갑스럽게 물었다.

메리엘은 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델카도르를 사정없이 찾아왔고, 델카도르는 그때마다 메리엘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델카도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어서 말씀해 주세요. 제가 들었다고 밖으로 새나간 적은 없잖아요.”

“그럴 만한 일이 없었을 뿐이지.”

“뭐라구요?”

델카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메리엘을 남겨두고 집무실을 나왔다.

“시끄러운 여자야.”

단층으로 되어 있는 로아 성의 집무실은 겨울인데도 꽤 후덥지근했다. 크레스포에 오염이 퍼지면서 추워진 것은 하이하프 뿐인 듯 했다.

“카시미르 산맥 위쪽만 날로 더워지는 것 같군.”

델카도르는 손사래를 치며 집무실에서 멀지 않은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과 책말고는 없는 델카도르의 집무실과 별 다를 것 없는 방이었다. 다만 구석에 델카도르가 애용해 온, 등을 기대기에 좋은 의자가 있다는 것이 달랐다.

털썩, 머리까지 기대어 앉은 델카도르는 봉투를 조심스레 두 손으로 잡아 올렸다.

“데비나….”

봉투에는 멋드러지게 쓴 비나엘르 파라이의 중간 이름이 적혀 있었다.

델카도르의 볼이 약간 상기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데비나님의 편지군.”

그때까지만 해도 델카도르의 표정은 온화한 편이었다.

그러나 봉투를 찢어내고, 편지를 읽기 시작하자 델카도르의 안색은 급격히 나빠졌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리온이 로아성을 지나 크레스포로 가도록 했다.

역사학자로 유명한 집정관 델카도르를 만나 그랜드 폴에 대한 진실을 자연스럽게 알도록 하고자 했고, 알로켄에 대한 진실도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헬리시타에서 출발해 카시미르 산맥과 크로오 산맥의 협곡을 지난 가리온의 데카론 일행은 순탄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가리온은 제노아 태생으로 예전에 아레스 숲을 지난 경험이 있었고, 에바도 북쪽을 여행한 경험이 있었기에 길을 잃지 않았다.

북쪽으로 갈수록 몬스터들이 강해지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적절했다.

가리온 옆에는 기사들과 궁사, 의사, 세그날레 그리고 룸바르트까지 있었다.

여행을 할수록 몰려드는 허기와 피곤이 문제가 될 만큼 힘들어지자 곧 로아성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를 만나 줄까? 우리가 누구인지도 모르잖아. 만나본 적도 없는데 의심하고 칼부터 들이대면 어쩌지?”

파그노는 로아성에 들어서자마자 계속 걱정만 했다.

로아성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청동색의 웅장함에 감탄사만 연발했다. 파그노는 심지어 집시 여인에게 추파까지 보냈었다.

“파그노. 그만해요. 비나엘르 파라이님이 소개서를 주셨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에바가 파그노의 걱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말했지만, 소용 없었다.

“소개서는 잘 가지고 있죠?”

“네.”

“절대로 잃어버리며 안 됩니다. 큰일나요.”

“네. 잘 가지고 있으니까 이제 제발 그 입 좀 가만히 두세요.”

사실 그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데카론의 문장이 찍힌 소개서 따위가 아니었다.

로아 성의 사람들은 신기한 것 구경하듯, 가리온 일행을 따라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트리에스테의 암살자 세그날레를 보는 것은 로아성의 사람들이 평생 비나엘르 파라이를 볼까 말까 한 것보다도 더 적은 확률이었으니까.

“타마라.”

“응?”

“너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들잖아.”

“후훗. 이러면 자꾸 피를 보고 싶어지는데.”

룸바르트와 타마라는 같이 웃었다. 어느 사이엔가 둘은 무척 친해져 있었다.

에바는 타마라를 나무랐다.

“타마라. 아까 내 말대로 두건이라도 써야 했던 것 아니야?”

에바는 도대체 조심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타마라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마라는 로아성까지 그런대로 성실하게 임해주었지만, 가끔 말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한 일은 에바와 다른 일행들에게 경계심을 품게 만들었다. 무언가 다른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은 얼굴도 그랬다.

“에바. 걱정마요. 타마라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타마라! 하지만,”

“동료를 믿읍시다. 동료를. 응? 에바. 타마라가 당신보다는 믿음직스럽다구.”

에바는 룸바르트를 노려보았다.

에바에게는 타마라나 룸바르트나 다를 바가 없었다. 룸바르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스울 뿐이었다.

‘가리온이 그 때 받아주지만 않았으면.’

룸바르트는 에바의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음흉한 미소와 손짓 인사를 날렸다.

“룸바르트.”

“이젠 잔소리 할머니가 다 되었군.”

에바는 기막힌 표정으로 가리온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지만, 가리온은 애써 눈길을 피하려 했다. 룸바르트와의 대결 이후 그를 받아주기는 했지만, 가리온에게 룸바르트는 부담감이 사라질 수 없는 존재였다. 가리온은 룸바르트를 피할 수 있을 만큼 피했다.

그러나 에바는 그런 가리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룸바르트를 받아 주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자, 그만하게, 저리로 올라가면 될 것 같은데?”

역시나 중재자는 헤이치 페드론이었다.

잔바크 그레이와 칸은 헤이치 페드론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알로켄족의 시절 때부터 있었던 로아는 부유한 도시였다. 아니, 귀족들의 도시였다. 가난한 천민들은 땅 가까이에 모여 살았고, 권력을 가진 귀족들은 보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 집을 지었다.

로아는 아름다웠지만 빈부의 격차가 유난한 곳이었다.

“오랜만이군.”

“잘 지내셨나요?”

모두가 눈이 휘둥그래졌다.

제일 눈에 띄었던 타마라가 델카도르와 반갑게 인사하고 있었다. 사실은 델카도르가 타마라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로아는 여전히 아름답군요.”

“브라이켄과 달리 아직 그렇게 심각한 지경은 아니지. 아레스 숲에서 조금만 더 버텼어도 지금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아레스 숲이 무너지면서 브라이켄 성도 같이 위험해졌다는 뜻이었다. 로아를 둘러싼 모르트 초원은 위험하기는 했지만, 아레스 숲처럼 오염에 찌들지는 않았다.

“자네 아주.”

“쉿. 가리온이 소개서를 가지고 왔어요.”

타마라는 무언가 말하려는 델카도르를 막고 가리온을 앞세웠다.

가리온은 정중히 소개서를 내밀었다.

“가리온 초이입니다. 비나엘르 파라이님이 보내셨습니다.”

“그래? 그렇군….”

델카도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자네들을 도와주어야 하지….”

“저희는 크레스포까지 갈 겁니다.”

“그래?”

“카론을 무찌르기 위해서죠.”

가리온의 대화를 가로채며 잔바크 그레이가 말했다.

잔바크 그레이는 델카도르에게 몹시도 당당했다. 데카론의 사명을 띤 위엄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별 효과가 없었다.

“카론은 쉽게 들먹거릴 수 있는 이름이 아니지.”

델카도르는 가리온의 일행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신뢰하지도 않았다. 가리온과 에바처럼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남쪽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북쪽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다네. 자네들을 쉽게 도울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

“무슨 어려운 일이든 말씀하십시오. 도와드리겠습니다.”

으스대고 싶었던 잔바크 그레이가 다시 한 번 호언을 늘어놓았다.

“어려운 일이야 한 두 가지겠는가….”

델카도르는 말끝을 흐리면서 타마라를 자꾸 쳐다 보았다.

“시간을 두고 생각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끝내 타마라가 한 마디를 하자 델카도르는 얼른 대꾸했다.

“내일 다시 찾아오게.”

델카도르는 그 말을 마치고서도 몇 번 더 타마라를 주시했다.

꼭 무언가를 확인하는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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