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Testament - 새로운 약속 - 9장. Insomnia. 잠들지 못하는 밤
| 21.01.13 12:00 | 조회수: 949


"타마라만 데려가면 됩니다."

잔바크 그레이와 파그노, 칸은 룸바르트를 쫓아내라고 성화를 했다.

룸바르트의 일행인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 아즈도 함께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상관을 해치려 했으니,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거 참, 독으로 상처를 눌러놨었다니."

"그러니까 패거리들은 전부 쫓아내야 합니다."

에바는 가리온을 살폈다.

아니, 에바는 가리온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에바는 가리온이 어떤 식으로 말할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가리온에게 고집과 소신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룸바르트를 당연히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가리온이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에바는 알고 있었다.

"그런 식은 좋지 않아요. 게다가 시리엘이 내 독을 발견했고."

가리온의 말에, 죄인처럼 고개도 제대로 들고 있지 못했던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 아즈가 쭈볏 움직거렸다.

"그냥 보내주십시오. 살려주신 것을 감사히 여기겠습니다. 저희들이 집을 비우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가리온은 헤이치 페드론을 노려보았다.

"아무도 돌아가지 않아."

가리온은 누구도 돌려보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단 한 명이라도 이탈자를 만드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을 이은 청기사단장으로서의 명예 실추 였다.

"그렇지만, 놈들을 어떻게 믿습니까?"

"지금 아무도 믿지 못하면, 나중에 우리끼리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겠다는 겁니까?"

"줄여도 괜찮아요. 어파치 타마라가 있지 않아요? 의사만 너무 많아요."

"그렇지만 타마라는 세그날레지 않아요?"

에바는 타마라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타마라가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

“가리온. 타마라는 안 되요.”

가리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절벽 사이로 기운 해가 쏜살같이 사라졌다. 트리에스테 대륙의 상징인 두 개의 달이 하늘로 불쑥 올라왔다.

“달이 떴어요.”

“결국,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

칸과 파그노의 대화 사이로 에바는 가리온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가리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에는 모든 것이 성급한 것 같았다. 가리온은 버릇처럼 검만 만지작거렸다.

‘… 검은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지.’

사실 가리온에게 많은 선택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가리온에게 유리한 상황도 아니었다. 명예로운 청기사단장이 되어야 할 가리온에게 룸바르트 겐조의 등장은 가리온의 얼굴을 부끄럽게 했다.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걸라고 명령해야 하는 부하 앞에서 죄인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하긴. 누구도 내가 어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지 않지.’

가리온은 검의 바깥 면을 물끄러미 보았다. 전혀 낯설지 않은, 그렇다고 무엇인가 시원하게 뚫리는 그런 느낌도 아니다. 저 검날은 가리온이 어깨를 돌려 손에 모은 힘으로 내려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만들지 않았다.

‘결국. 내가 스스로. 풀어야 할 일….’

세상 이치가 그런 것처럼, 선택은 가리온이 해야 하고, 후회도 가리온이 해야 했다.

‘나의 일.”

가리온은 아버지의 일을 잠시 묻어두고 청기사단장의 위치를 되새겼다. 그것이 지금 가리온의 위치였으니까.

‘나는. 나의 아버지는. 듀스 마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지만.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는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 나는 청기사단장이니까.’

가리온은 굳게 마음을 먹었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라면, 무엇도 돌아보지 않기로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들을 이끌고 가야 하니까.’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는 에바를 향해 가리온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에바.”

잔바크 그레이와 파그노, 칸 그리고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 아즈도 가리온의 결정을 기다렸다.

‘나는 가장 기사다운 방법으로 사죄하고, 자격과 신임을 얻겠다.’

가리온은 검을 꾸욱 쥐었다.

룸바르트는 이제 어찌해야 할까 고민했다. 가리온 초이에게 자신의 위치를 들킨 이상, 돌아갈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가 살아 있어….”

만나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복수를 할 만큼 했다는 생각도 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다면, 그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인카르 신전 지하에서 경험했던 그의 고뇌를 이상하게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얼굴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기라도 하는 것인가…. 훗. 바보 같은 생각만 하는군….’

룸바르트는 파그노에게 받은 검을 들어 보았다. 검은 생각보다 무거워서 금방 숨이 차 올랐다. 가리온이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검 하나로도 벅찼다.

‘검도…. 여기 이곳도…. 저 사람들도…. 나와는 안 어울려.’

룸바르트는 검을 멀리 던졌다.

“그 검. 다시 들게.”

어스름한 달빛 아래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 아즈가 룸바르트를 찾아내었다.

“돌아갑시다.”

“가리온과 검을 세우게.”

“돌았군요.”

“가리온님이 기회를 주신데요.”

시리엘 아즈가 룸바르트를 향해 외쳤다. 아스라히 달빛만 비춰 들어오는 절벽 사이는 기회라는 말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기회는 무슨 기회?”

“자네. 그를 보기 위해, 따라 나섰던 것 아닌가?”

“그때는 제가 좀 미쳤었어요. 이젠 돌아갈 겁니다.”

“가리온이 자네에게 결투를 신청했네.”

룸바르트는 또 다시 멍해지는 것 같았다.

“할 수 있다면, 죽일 수도 있겠네요.”

달빛이 들지 않는 곳, 어둠 속에서 타마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가리온은 현명한 선택을 한 거예요.”

타마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과 싸워서 이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 일 테니까. 만약 당신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룸바르트 겐조는 가리온 초이가 두려워 도망친 것 밖에는 안되죠. 가리온은 일행들에게 신뢰를 얻게 될 거예요.”

“헛소리 집어치워.”

“뭐, 도망자라는 소리가 듣기 싫다면 싸우면 될 테지만. 할 수 있겠어요?”

룸바르트는 이를 악물고 전갈을 가져 온 두 사람을 노려 보았다.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 아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룸바르트가 끌어 온 검은 바닥에 길다랗게 선을 만들었다.

“아니! 검을 저런 식으로 다루다니!”

검의 원래 주인이었던 파그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저, 무식한 놈! 흥, 네가 아무리 재주를 부려봤자 가리온님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룸바르트는 피식 웃었다.

알고 있었다.

룸바르트는 가리온을 이기지 못한다. 다이몽 루세에게 항상 졌던 자신이었기에 검으로는 가리온에게 질 것이 뻔했다.

그래도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룸바르트의 장기인 소환술을 쓰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몰랐다.

“검을 제대로 들어라.”

룸바르트는 고개부터 들었다. 달빛에 닿은 가리온의 거친 얼굴선 반대편에 윤곽이 잘 빠진 룸바르트의 얼굴 선이 마주했다.

가리온은 무슨 말이라도 할까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룸바르트의 표정은 웃는 것도 그렇다고 슬퍼하는 것도 아니었고, 분노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쩐지 이 모든 표정을 담고서 현실을 초월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룸바르트는 가리온을 보다가,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가리온 근처에는 에바가 있었다.

‘왜, 늘 저 자리지?’

룸바르트는 에바를 노려보았다.

‘당신은 에바 때문에 죽어요.’

타마라가 했던 말이 귓속에 들어앉은 벌레처럼 웅웅거렸다.

“검을 들어라.”

가리온이 룸바르트를 향해 말했다.

가리온은 룸바르트와의 대결을 통해서 데카론 일행의 신뢰는 물론, 자신의 죄책감도 덜고자 했다. 이기적일지는 몰라도, 가해자는 자신이 아니었다.

“….”

가리온의 목소리가 벌레를 후벼 판 듯, 꽂혀 들어왔다.

룸바르트는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 아즈를 돌아 보았다.

굳어버린 헤이치 페드론 뒤로, 시리엘 아즈가 손을 꼭 쥐고 있었다.

“….”

룸바르트는 검을 들기 시작했다.

가리온은 룸바르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잘 부탁한다.”

룸바르트는 다이몽 루세와 수련하던 때가 떠오르려 했지만, 지워 버렸다. 이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가리온이 검을 들어 바짝 다가오자, 갑자기 룸바르트의 눈이 흐릿했다. 윤곽이 잡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멀리 있던 작은 자갈만 선명했다.

철썩.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큰 소리와 고통이 밀려왔다.

본능적으로 팔을 뻗었지만, 소리는 더 빨랐다.

비스듬히 에바의 얼굴이 보일 때까지, 철썩. 날의 등으로 때리는 소리가 계속 울렸다.

‘너무하잖아.’

룸바르트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지만, 에바는 무표정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차가운 눈으로 룸바르트를 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죽고 싶다고!’

그 순간, 한쪽 무릎이 절로 꿇어졌다.

타마라가 말했었다.

“만약 당신이 죽어버리면, 에바가 눈물을 흘릴까요?”

타마라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룸바르트가 가리온과의 대결을 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번 일로 죽지는 않아요. 당신은 에바 때문에 죽으니까.”

타마라는 크게 웃었다.

“그렇지만 룸바르트. 당신은 어차피 슈마트라 초이와 가리온 초이를 벗어날 수 없어요.”

잔인한 타마라의 말이 철썩, 검 때리는 소리에 맞물렸다.

룸바르트는 가리온을 올려다 보았다.

“또 졌군….”

눈 끝을 아슬하게 피해 피가 흘러내렸다.

“그냥. 내 목을 베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룸바르트는 눈을 감아버렸다.

가리온은 검을 거두었다.

어쩐지 손이 부끄러웠다.

달빛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모두.”

가리온은 숨을 몰아 쉬었다.

“쉬도록 해. 내일의. 데카론을 위해서.”

가리온은 등을 돌렸다.

그날 밤, 누구도 잠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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