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low Yesterday - 역사의 시간 - 8장. Eva. 버려진 아이
| 21.01.06 12:00 | 조회수: 975


에바는 활을 잘 쏘았다.

그것은 사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세지타족으로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고, 칭찬 받을 만한 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누구도 에바를 칭찬하거나 독려하지 않았다.

자신을 감싸 줄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지타족들 사이에서 에바를 다독거려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반면에 정확한 현실을 일깨워 주는 이는 언제나 차고 넘칠 정도로 그득했다.

“피가 더러운 주제에 활은 꽤 쏘는구나.”

“넌 사생아야. 버려진 아이지.”

“아이리스 비노쉬님이 널 싫다고 했어.”

에바가 태어났을 때, 디에네 비노쉬에게는 남편이 없었다. 즉, 에바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아버지는 방랑자였고 에바가 태어나기도 전에 네오스를 떠났다고 했다.

에바는 그 사실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옳은 말만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는 너무 뚜렷했다.

하지만 에바까지 자기 자신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그들처럼 증오하기로 했다. 모두 잊고 나만 생각하자,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그것으로 됐다고 믿었었다.

그런데 루앙 광장 한 켠에서 가장 그리웠던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엄마….”

이를 악물었지만 눈물이 흘렀다.

사실은 너무도 사랑 받고 싶었다.

팽팽하고 날카롭게 세운 줄을 쥐어 잡은 후에 힘껏 당긴다.

조금만 더 당겨도 끊어질듯한 긴장감이 몸놀림을 빠르게 만든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빠르게 진행되는 동작이 물결을 타는 리듬 같았다.

작은 새의 노래를 신호 삼아 숨을 고른 에바가 거칠고 차가운 감촉의 줄을 좀더 꽉 잡아 당겼다.

“하아.”

에바의 숨이 팽팽한 줄을 뚫고, 곧고 자연스럽게 뻗은 팔의 굴곡을 따라 뻗었다.

그 끝에 에바가 겨냥하고 있는 목표가 있었다.

유선형의 자태가 멋스러운 관상초의 줄기를 따라 초록 이슬이 도로롱 굴러 나무 밑동을 박은 오솔길에 톡 떨어졌다.

“호호호.”

“라큔님도 참.”

입을 살짝 가리며 즐거운 웃음을 짓는 수행원들 사이에 세지타족의 최고 지도자인 라큔, 아이리스 비노쉬가 서 있었다.

꾸욱.

에바의 손이 바르르 떨리자, 활시위도 부르르 떨었다. 노래하던 새가 푸드득 날아오르더니 숲 사이로 낮게 사라졌다.

‘아직은 할 수 없어!’

팅.

활줄이 끊어져 버렸다. 긴장을 오래 가두어서는 안되었다.

“하아….”

아이리스 비노쉬는 에바의 존재를 눈치채고 축 처진 화살촉을 똑바로 내려보며 걸어왔다.

“목표를 겨냥했으면 활을 쏴야지.”

길게 뻗으며 찰랑거리는 자주색 머리카락과 짙은 갈색 눈동자가 에바를 빤히 쳐다 보았다. 에바가 다르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세지타족은 언제나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밖으로 뻗기보다는 내실을 강하게 키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폐쇄된 그 안에서 누군가가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에바도 그래서 세지타족으로서 포함될 수 없었다.

“활줄만 아깝군.”

에바는 하늘색 눈을 내리깔며, 화살을 어깨 옆으로 내려 들었다. 곱슬거리는 붉고 짧은 머리가 숲에서 휘어 오르는 바람과 함께 날렸다.

바람은 곧 하늘에서 비가 되어 우둑우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리스 비노쉬님!”

“비가 와요! 얼른 들어가요!”

작은 비는 곧 큰 폭우로 바뀌었다. 이런 비는 네오스에 종종 오는 손님 중 하나였다.

에바는 서둘러 활과 활집을 챙겼다. 화살집으로 대강 머리를 가리고 뛰려는 찰나 아이리스 비노쉬가 붙잡았다.

“함께 들어가자.”

에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리스 비노쉬를 올려다 보았다.

“제, 제가 같이 가도 되요?”

잔뜩 기대하는 에바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아이리스 비노쉬는 옆으로 비켜섰다.

“화살집은 소중히 다루어야지.”

“아. 네. 대모님.”

에바는 얼른 화살집을 내려 가슴에 꼬옥 끌어 안았다.

“아이리스 비노쉬님!”

“이 안으로 들어오세요!”

커다란 차양을 펼친 수행원들이 자갈밭을 갈라 총총 뛰어왔다. 그리고는 아이리스 비노쉬가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차양을 씌웠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에바의 작은 체구에도 넉넉한 차양이 살짝 드리워졌다. 에바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미의 여신 큔이 새겨져 있는 차양을 구경하였다.

“왜? 너도 쓰게?”

에바는 살얼음 같은 목소리에 놀라서 흠칫했다.

“아, 아뇨.”

에바는 슬며시 차양을 벗어나 한 발 떨어졌다.

“그래야지.”

흡족한 표정의 아이리스 비노쉬는 똑바로 앞을 보고 말했다.

“자, 가자.”

에바는 망설이다가 졸래졸래 수행원들 뒤를 따라갔다.

수행원들은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넓은 차양에 몰래 머리를 집어 넣었다. 그들은 선선하게 내리는 비를 아름답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에바.”

수행원들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에바는 얼른 차양 옆 쪽으로 달려갔다.

“네?”

아이리스 비노쉬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떴다 하고 있었다.

“올해 나이가 몇이지?”

“아홉 살이에요!”

“그럼 알 때도 되지 않았니?”

에바는 또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나 싶어 머뭇거렸다.

“나는 네 대모 따위는 하고 싶지 않구나.”

에바는 무의식적으로 차양을 비켜 걸었다.

“네 눈동자나, 머리칼을 볼 때면.”

길이 질퍽해져 진흙이 튀어 올랐다.

“저주스러워져.”

에바의 발이 자연스레 늦춰졌다.

수행원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성에 도착했을 즈음에 에바의 빨간 머리는 비에 푹 젖어 곧게 펴져 있었고 활과 화살은 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자기 방으로 걸어갔고 수행원들은 에바 옆에서 차양을 툭툭 털었다.

“낄낄.”

“대모님은 무슨.”

“눈치가 없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분수를 모르는 거지.”

“그만해.”

에바는 수행원들을 노려보았다.

“하여튼 간에 조금만 뭐라고 하면 노려보고. 어린 애가 저런 걸 어디서 배웠나 몰라?”

“얘, 우리는 아이리스 비노쉬님을 모신다구. 너 따위 근본도 모르는 애한테 굽실거릴 이유가 없어.”

“어른이 말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잠자코 있을 것이지.”

에바는 수행원들을 노려보다가 홱 돌아섰다. 어차피 자신의 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머! 저게!”

“야! 너 어딜 가니!”

수행원들은 자기들끼리 멈추지 않고 속닥거렸다.

에바는 탁탁 계단을 올라갔다. 공기가 서늘한 성이 비에 푹 젖은 에바를 덜덜 떨게 만들었다.

‘너희들 따위.’

세지타족이 주로 사냥하는 동물들이 잔뜩 그려진 긴 깔개를 밟고 세지타족을 수호하는 큔의 초상화를 여러 번 지나 에바는 자신의 방에 도착했다. 뒤뜰과 가까운 아담한 방을 에바는 사랑했다. 유일한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휴우.”

문을 열고 들어가 푹 쉬어볼 참이었지만, 그것은 좀 더 뒤로 미뤄야 했다. 아니 미뤄도 되었다.

“이제, 오는구나.”

디에네 비노쉬는 에바의 크기에나 알맞을 만한 작고 낮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에바가 들어오자 읽던 책을 덮고 일어섰다.

‘엄마!’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대신 다른 말을 뱉었다.

“라피오레님! 웬일이세요?”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서,”

“아니! 전 괜찮아요!”

에바는 아차 싶었다. 자신의 말이 전혀 앞뒤가 맞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세지타족의 군대와 병력을 통제하는 라피오레의 말을 끊어 버렸다. 에바는 디에네 비노쉬를 앞에 두고 발을 동동 굴렀다.

‘실망하실지도 몰라! 어쩌지?’

디에네 비노쉬는 에바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었지만, 물이 뚝뚝 흐르는 모양은 봐 줄 수가 없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라.”

“아. 네!”

에바는 서둘러 활과 화살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 옷장을 뒤적였다.

“이걸 입으면 좋겠구나.”

디에네 비노쉬가 뒤로 성큼 다가와 직접 옷을 골라 주었다. 에바는 잠시 놀랐다가 얼굴 가득 미소가 퍼졌다.

“… 네! ……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마지막이야.”

디에네 비노쉬는 젖은 옷을 받아 바구니에 넣으며 말했다. 딱히 지금 말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기에 문득 입에서 튀어나왔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네?”

에바는 총총거리며 디에네 비노쉬 곁으로 다가갔다.

디에네 비노쉬는 에바의 어깨를 꾸욱 잡았다.

에바는 어깨가 저렸지만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활을 잡아 거칠고 두꺼운 손이 너무도 따뜻했다.

그렇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전에도 몇 번 이렇게 어깨를 잡아 준 적은 있었지만, 살짝 걸친 것뿐이었다. 이렇게 세게 잡지는 않았다.

“혼자서 잘 해낼 거라.”

디에네 비노쉬의 깊은 한숨이 방을 가득 채웠다.

“믿어.”

디에네 비노쉬는 다음 날 네오스를 떠났다.

“안돼! 어디 가는 거예요?”

세지타족의 성을 떠난 디에네 비노쉬를 따라 에바는 조그만 발로 마구 뛰었다.

“엄마! 엄마!”

찰싹.

그렁그렁한 에바의 눈이 흔들렸다.

“역겨워.”

아이리스 비노쉬는 에바를 그대로 스쳐 디에네 비노쉬의 뒤를 따랐다.

“너 좀 이리 와봐.”

수행원들은 아이리스 비노쉬를 따라가지 않고, 에바를 손짓했다.

“엄마……. 나를……. 버리는 거야?”

에바의 귀에 수행원들의 말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수행원들과 몇몇 세지타들이 에바를 꽉 잡아 끌었다. 에바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몽롱한 채로 질질 끌려갔다. 그들은 에바가 세라피의 기운을 타고 났기 때문에 네오스가 흉흉하다고 몰아 부쳤지만 에바는 정확히 듣지 못했다. 어차피 그들 좋을 대로의 논리일 것이었다.

“거기 서.”

도착한 곳은 해안가 절벽 위였다. 그들은 절벽 끝까지 에바를 몰았다.

디에네 비노쉬의 결혼식으로 아이리스 비노쉬가 중요 인사들과 출타한 사이였다.

“아!”

절벽에서 떨어질 때 에바는 시원했다.

바람이 거꾸로 솟았다. 지평선이 거꾸로 보였다. 피가 온 몸을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후회가 몰려왔다.

“내가 지금 왜!”

위는 올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했다.

풍덩.

에바의 몸이 검은 바다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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