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olutio - 의식 - 12장. Andante. 느린 걸음
| 20.12.30 12:00 | 조회수: 970


슈마트라 초이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손을 묶인 채로 걷고 있었지만 눈을 뜨지 않아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개가 절로 떨어뜨리어졌다. 물끄러미 바라본 손이 지난 세월처럼 거칠었다.

돌연 검을 잡았던 손끝의 감촉이 느껴졌다. 처음 멋모르고 검을 잡았을 시절의 들뜬 듯 조심스러웠던 느낌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 잡았던 그 생명력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사그라지고 듀스 마블 앞에서 치욕스럽게 뜨거운 검을 잡았던 그 순간의 감촉이 슈마트라 초이를 괴롭혔다.

처음부터 듀스 마블이 자신을 노린 함정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슈마트라 초이는 피해가지 않았다. 무고한 이를 죽였다는 것이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슈마트라 초이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자네, 제노아에 가 본 적이 있는가?”

누구도 슈마트라 초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슈마트라 초이는 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말했다.

“제노아에는 많은 기사들이 있지. 혼자서 수련을 쌓고 활동하는 경우도 많지만, 뜻이 맞는 기사들이 단체를 만드는 경우도 흔하다네. 수많은 기사들이 그렇게 제노아를 채우고 있지. 전체가 모여 하나로 통일 되지는 않았어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경쟁과 화합을 아우른다네.”

슈마트라 초이는 잠시 이야기를 중단하고, 기사들끼리의 승부로 언제나 먼지가 가라앉지 않는 제노아를 떠올렸다.

“그런데 인카르에서는 제노아를 그렇게 보지 않았다네. 분쟁이 끊임없는 오합지졸들로만 여겼지. 북쪽의 땅을 주무르기 위해서는 제노아의 협조가 필요했는데 그게 잘 안되었던 거야. 그래서 조디악들은 기사들을 고분고분하게 해 줄 파견관을 제노아에 보내기로 한 것이지.”

룸바르트는 사촌 다이몽 루세를 제노아의 파견관으로 선발했다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날이었다.

“나는 노력했고, 믿었네. 청기사단이었던 내가 인카르와 제노아를 화해시키겠다고, 마음먹었지. 기사의 뜻을 인카르에 전하고, 오염체가 말썽을 부리는 트리에스테 대륙을 구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네. 가족들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나의 신념이었네.”

슈마트라 초이는 디에네 비노쉬를 잠시 응시하고, 홀로 창을 들고 집을 떠나던 가리온을 떠올렸다. 후회 섞인 숨을 한 번 걸러내고야 말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자리는 눈앞에 있는 듯 아른거렸지. 곧 잡힐 듯 했어. 그런데 그게. 착각이었더군. 내가 쌓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순식간에 나를 허물어뜨렸네. 원래 감추고자 하는 사람에게 약점이 더 많은 법인데. 내가 딱 그 꼴이었어.”

디에네 비노쉬는 슈마트라 초이의 손을 잡아 주었다.

“내 앞에서 길이 끊기는 그 순간. 믿음이 박살나던 그 순간. 나는 여러 길 중에 제노아를 위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네.”

슈마트라 초이는 룸바르트에게 했던 말을 곰곰이 되새겼다. 다시 한번 밀려오는 죄책감에 룸바르트의 모습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자마자 호된 채찍 소리가 귀를 스쳤다.

“어딜 보는 거야? 똑바로 앞으로 가!”

고문관이었다. 슈마트라 초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내 탓이다. 이 저주 받을 피가. 이 저주 받을 피가 이렇게 만든 것이야.”

울분을 삼키며 눈을 뜨자 송진내가 이글거리는 단상이 눈에 들어왔다. 광장에 모인 군중들의 야유 소리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슈마트라 초이는 눈을 틀어 디에네 비노쉬를 바라보았다.

디에네 비노쉬는 완전히 지쳐버렸는지 거의 쓰러져서 걷고 있었다.

슈마트라 초이는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 온 사과가 슈마트라 초이의 뺨을 찰싹 때렸다.

“사람을 죽이고도 멀쩡히 걸어다니냐!”

슈마트라 초이는 번쩍 눈이 뜨였다.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 살인마!”

슈마트라 초이는 쥐었던 주먹의 힘을 다시 풀 수밖에 없었다.

고문관이 때를 놓칠세라 쫑알거렸다.

“이봐, 고개를 좀 더 뻣뻣하게 들라구. 죄인이 너무 고개를 푹 숙이는 것도 좋지 않아. 얼굴을 좀 쳐들어야 사람들이 침 뱉을 맛이 나지. 안 그래? 퉤엣. 키키킥”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에게 보내는 야유와 웅성거림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고문관은 개선장군마냥 군중들에게 씩씩한 미소를 선보였고, 룸바르트의 술에 젖은 눈과 입술은 처량맞게 빛나고 있었다.

헬리시타의 사람들은 정성스레 싸왔던 도시락을 풀어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에게로 날렸다. 갖가지 음식이 섞이면서 고약하고 찌릿한 내가 진동했지만 그들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고문관은 그런 음식 세례를 즐기고 있었지만, 어쩌다 자신이 맞아버리면 던진 사람의 앞에 달려가 으르렁거렸다.

룸바르트는 술에 절어버려 사람들이 모여 있다거나 음식 섞인 내가 심하게 진동한다든가 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걸음도 갈수록 쳐져 어느덧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사람들 사이에 묻혀 버렸다.

“이런.”

룸바르트는 술통을 놓쳐 그것을 다시 집으려 했지만, 단상 앞자리를 잡으려는 인파가 워낙 거세 휘청거렸다.

“조심하게.”

“어? 당신 누구지? 당신 누구야? 어! 우리 의사 친구님이네?”

룸바르트는 꼬부라진 혀로 헤이치 페드론에게 안겼다.

“어디로 사라졌던 겁니까? 날 혼자 두고 말이야. 그 계집애가 오고 난 후부터 없어졌었죠? 응? 어떻게 어디로 숨었나?”

“뒤로 조금 물러나 있는 게 좋겠어.”

헤이치 페드론은 사람들을 가르고 룸바르트를 끌고 가려 했다. 그러자 룸바르트는 갑자기 발버둥쳤다.

“싫어! 놔! 난 볼 거야! 우리 아버지를 죽인! 저 검성이라는 놈을!”

사람들은 어느 새 룸바르트 주위로 몰려들었다.

“죽은 사람의 아들인가?”

“그런가 본데?”

“이런, 쯧쯧.”

헤이치 페드론은 룸바르트를 달래려 했다.

“룸바르트. 그만하게!”

“이거 놔! 놓으라구 했잖아!”

룸바르트는 헤이치 페드론을 거세게 물리쳤다.

“저 녀석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 내 사촌을. 죽이고! 내. 나의 아버지도! 크흑.”

룸바르트는 쓰러질 것만 같아 두 손을 얼굴로 가리며 허리를 접었다.

“그러니까! 나는! 똑똑히 봐야 해! 나는! 나로서는! 저 자를 어떻게. 쳐 낼 수가 없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나는 똑똑히 봐야 해!”

“룸바르트!”

그러자 한 사람이 다가와 룸바르트에게 과도를 쥐어 주었다

“이걸로 저 사람을 찌르시오! 당신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소!”

그 사람의 말에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외쳐댔다.

“맞아요! 맞아!”

“찔러버려!”

헤이치 페드론은 조심스럽게 룸바르트의 얼굴을 살폈다. 과도를 보는 룸바르트의 눈과 손은 틀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룸바르트는 끝내 그 작은 칼을 잡지 않았다.

“그런 더러운 일은,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자들이 할 것이오.”

“뭐라구요?”

“제일 더러운 자들이 할 일이오.”

사람들은 룸바르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하는 거야?”

“뭐, 안 하는 건가?”

“거, 얼른 갑시다. 좋은 자리 놓치겠네.”

“에잉. 시시해.”

구경거리를 놓친 사람들은 실망하며 다시 슈마트라 초이를 따라 걸었다.

사람들이 떠나자 룸바르트는 두려운 듯 얼굴을 감싸 안았다.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아. 그 마음 알고 있네. 이제 그만 해도 되네. 복수라는 것은 너무 무거운 짐이야. 이만큼 했으면 됐네.”

“……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헤이치 페드론과 룸바르트는 뒤쪽으로 물러났다.

듀스 마블은 조디악들과 함께 인카르 신전 가까운 데에 자리를 잡았다. 대부분의 조디악들은 선선한 오후 바람을 쐬며 여유롭게 앉아있었지만 몇몇 조디악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것은 사죄의식이라는 행사를 비나엘르 파라이 없이 진행하기 때문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직접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 슈마트라 초이를 만난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게다가 비나엘르 파라이가 슈마트라 초이를 감싸고 있다는 소문이 조디악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듀스 마블은 괘념치 말라며 안심시켰지만, 예감이 좋지 않은 조디악들은 자리를 불편해 했다.

듀스 마블은 그런 그들을 그냥 두었다.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듀스 마블이 원하던 바가 이루어질 것이었다.

슈마트라 초이가 비나엘르 파라이의 아들이 사실이라면 알로켄족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트리에스테 대륙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슈마트라 초이를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슈마트라 초이가 듀스 마블을 위협할 정도로 더 커지기 전에, 슈마트라 초이 자신에 대한 비밀을 알기 전에 없애야 했다.

‘사죄의식이 끝나면 비나엘르 파라이도 어쩔 수 없겠지.’

듀스 마블은 생각을 정리하며 일어섰다.

듀스 마블은 하얀색 클라스를 털며 한 발 한 발 기분 좋게 앞으로 나섰다.

인카르 신전 앞에 마련된 단상에는 아직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가 오르지 않아 듀스 마블은 가슴을 넓게 펴 뒷짐을 지고 죽 둘러보았다.

높은 난간에서 내려다보이는 루앙 광장은 인파로 오밀조밀했다. 루앙 광장에 세운 인카르 교단의 12 신상도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마침내 나의 세상이 오는구나!’

듀스 마블은 뒤를 돌아 조디악들에게 말했다.

“인카르의 힘을 보여줍시다.”

하얀 천으로 덧씌운 의자에 앉아 있던 조디악들은 몇몇은 듀스 마블을 향해 열렬히 미소 지었고, 또 몇몇은 땅으로 눈동자를 굴리거나 광장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듀스 마블은 굳이 조디악의 태도나 성향을 알아보기 위해 했던 말이 아니었기에 싫은 표정을 지은 조디악이 있어도 인자한 모습으로 광장을 향해 돌아섰다.

‘너희 같은 겁쟁이들은 필요 없지.’

듀스 마블은 속으로 생각하며 주홍빛 오클라스를 인파 속에서 찾아내었다.

시에나는 정지된 채로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가 야유를 받으며 단상까지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씩 서늘한 칼바람이 불어와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듀스 마블은 그런 시에나의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오늘은 의식을 치르기에 정말 좋은 날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듀스 마블은 기분 좋은 콧바람까지 날렸다.

이제 인카르의 위력을 보여 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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