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백 마리의 라쿤이 앞으로 뻗은 길을 꽉 막고 있었다. 다 썩어 색을 잃은 낙엽과 비슷해 보이는 등껍질은 그 위를 투명한 칠을 덧바른 듯 반질거렸다. 몸통의 상부와 중간 그리고 하부를 각기 보호하는 덮개의 중앙이 날카롭게 들려 적을 위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글우글 통로를 빈틈없이 매운 라쿤들은 벽과 바닥에 착 달라붙어 매끄러운 비늘이 덮은 목을 길게 빼고 가리온과 에바가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가리온과 에바는 굴곡진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
“이래서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겠군. 시간이 배로 걸리겠소.”
에바는 뒤를 힐끗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몇이나 죽였는지도 셀 수 없겠는데요.”
“먼저 나갑니다.”
“네.”
지름길이라는 데비나의 제안으로 이 좁고 탁 막힌 통로를 걷기 시작했지만, 계속해서 몰려드는 오염체들로 인해 시간을 단축하기는커녕 계속 지체하고만 있었다.
“그럼 부탁해요!”
가리온이 호흡을 가르고 굴곡진 벽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정렬하며 기다리던 라쿤은 일제히 작고 투명한 독침을 쏘아댔다.
라쿤의 독침은 맞은 사람을 마비시켰다. 가리온이 하나라도 맞게 되면 움직일 수 없게 된 몸뚱이를 라쿤이 뒤덮어 버릴 것은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결과였다.
가리온은 정면을 달리며 크루어로 독침을 튕겨냈다. 그 사이 에바는 좌우 가에 있는 라쿤부터 차례로 쏘아 죽였다.
“좋아요! 이동해요!”
가리온이 가운데 있던 라쿤들을 향해 돌진하며 말했다. 라쿤은 가리온을 향해 목 아래에서 뻗어 나온 채찍 같은 것을 마구 돌렸다. 사지를 마비시키는 독이 들어있는 독주머니였다.
“흐엇!”
가리온이 독침과 독 주머니가 달린 줄기를 피하며 라쿤을 베어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 에바는 사선으로 달려 나와 반대편 벽에 붙었다. 에바는 호흡을 정리하고 다시 자세를 잡으며 가리온에게 외쳤다. “자리 잡았어요!”
에바의 화살이 라쿤을 향해 날아갔다. 과녁이 된 라쿤이 빨간 피를 뿌리며 터지기도 전에 에바는 다음 화살을 날렸다. 이제는 가리온이 옆의 벽으로 몸을 붙일 순서였다.
“알았어요!”
가리온은 중심을 다시 잡고 검을 크게 휘둘렀다. 이제부터는 속도전이었다. 검을 크게 회전시켜 좀 더 많은 라쿤을 한꺼번에 쓰러뜨려야 했다. 그래야 가리온이 위치를 다시 잡을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 동안 촘촘하게 쏟아 들어 올 수 있는 독침의 가능성은 뒤에서 에바가 봐주어야 했다. 덕분에 가리온과 에바의 호흡은 척척 맞게 되었다. 가리온이 먼저 나서서 라쿤을 상대할 때 에바는 좀 더 앞으로 이동하고 에바가 뒤에서 엄호를 하면 가리온이 다시 위치를 잡는 것이다. 시야를 좀 더 멀리까지 확보하고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가리온과 에바는 이런 지루한 순서를 계속 반복해야 했다.
“호흡이 잘 맞는군.”
사정거리 밖에서 여유롭게 다가오는 데비나의 목소리에 에바의 표정이 굳어졌다.
“좀 돕지 그러세요?”
말을 하면서도 에바는 라쿤을 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에바는 말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 공격에 마법을 더하면 저렇게 빽빽한 라쿤들을 좀 더 빨리 쓰러뜨릴 수 있을 거예요.”
비나엘르 파라이는 에바의 당돌함에 놀랐는지 크게 웃어댔다. 에바는 그 웃음이 기분 나빠 더 몰아붙였다. “데비나님은 이 지하 통로가 지름길이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오는 내내 가리온님과 저는 라쿤들을 상대하고 있어요. 그런데 데비나님은 까딱도 안 하셨죠.”
“그래?”
비나엘르 파라이는 에바의 말에 코웃음 쳤다.
“네! 절벽에서 괴물을 만들어 낼 정도의 분이시라면 저런 라쿤 쯤이야 간단하게 해치우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에바의 화살이 날카롭게 날아가 쿤다의 이마에 박혔다.
“후우.”
가리온은 다시 몸을 피하려 했지만 한꺼번에 몰려드는 독침을 한 손으로 감당하기 벅찼다. 계속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라쿤들도 독침을 한 방향으로만 보내지 않고 넓게 퍼뜨렸던 것이다. 에바만 믿고 앞을 비우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또 가리온이 라쿤을 직접 찾아다니며 베는 것도 일이었다. 가리온은 정신없이 이동하면서 오염체를 쓰러뜨리는데 바빴다.
‘한 걸음만 더 가자.’
가리온이 왼편에서 날아오는 독침을 피해 오른편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맞은편에서도 독침이 날아왔다. 가리온은 재빨리 크루어를 오른쪽으로 돌려 날아오는 독침을 막으려는 사이 앞에서도 독침이 또 날아왔다. 가리온의 왼쪽으로 검을 다시 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가리온은 본능적으로 왼손을 들었다.
“안돼!”
가리온의 귀로 독침이 스쳐가는 소리가 휙휙 지나쳤다. 크루어로 막은 독침이 챙하고 부딪히는 소리도 들렸다. 앞쪽에서 날아오던 독침의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가리온이 오른쪽 독침을 튕겨내고 앞을 보자 눈앞에 하얗게 긴 선이 있었다. 가리온은 놀라기도 전에 왼팔을 뒤로 빼고 크루어로 앞에서 독침을 쏘았던 라쿤을 베었다.
가리온은 하얀 선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두 번째 검이다!’
두 개의 검을 이용해 라쿤을 찌르면 분명 속도기 훨씬 빨라질 것이었다. 검을 나누어 하나는 공격을 하고 하나는 방패처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가리온은 차마 왼 손을 낼 수가 없었다.
‘이. 이 검을 쓸 순 없어!’
가리온은 몸을 휘익 돌려 벽 쪽으로 붙어 섰다.
“후우. 후우.”
큰 숨이 멈추지 않았다. 입김을 한참이나 뱉어내야 했다.
‘알로켄족이 아니야. 아니야. 나는.’
마음을 다시 가다듬은 가리온은 에바와 데비나를 번갈아 보았다.
“다시 가죠!”
비나엘르 파라이의 불쾌했던 표정이 온화하게 바뀌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에바를 향해 톡 쏘았다.
“저런 기사가 있는데 내가 뭣 하러?”
비나엘르 파라이는 에바를 제치고 가리온이 뚫어놓은 길을 향해 걸어갔다.
에바는 화살을 들어 데비나의 등을 쏘아보다가 입술을 깨물며 방향을 틀었다. 에바의 화살이 데비나를 살짝 비켜 쏜살같이 라쿤에게로 날아갔다.
카시미르 산맥 끝자락 마을에 제노아의 병사들을 숨겨 놓은 잔바크 그레이는 계속해서 헬리시타의 성벽을 살폈다. 병력을 숨기기에는 제격인 곳이었다.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듯 적막하기만 마을은 심지어 으스스한 분위기까지 자아내어 아무나 쉬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기운이 있었다. 게다가 멀리 헬리시타의 회색 성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기도 했다.
“잔바크. 아직 인가? 해가 기울고 있어.”
“그러게. 이거 큰일인데요?”
“우리가 괜히 움직인 거 아닌가?”
“그러게. 어쩌죠?”
잔바크 그레이는 파그노 사강과 칸 하이러스키 사강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급한 성격의 잔바크 그레이는 아이언 테라클이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아 초조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불 난 집에 부채질 하듯 잔바크 그레이에게 질문을 해대며 연신 괴롭혔다.
“여기까지 데려 온 내 잘못이지.”
“뭐?”
“뭐라고 했어요?”
“역시. 오지 말았어야 했지?”
파그노와 칸은 제노아에서도 눈치 없기로 소문난 남매였다. 잔바크 그레이는 이 두 사람만은 데려오고 싶지 않았건만, 큰일에는 절대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잔바크 그레이가 머리를 좀 굴려 보려는 순간에도 남매는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뭘 어떻게 해? 우리가.”
“하기는. 그렇지요?”
잔바크는 애써 참아내며 두 사람의 입을 막았다.
“나도 걱정이라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구.”
하지만 남매의 입은 곧 다시 터지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 아이언 테라클님이 오시긴 하는 건가?”
“정말 오시나요?”
잔바크 그레이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초조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잔바크 그레이는 고개를 돌려 한숨만 쉬어냈다.
“이러지 말고, 제가 직접 가볼까요?”
“뭐?”
잔바크 그레이는 고개를 돌려 칸을 보았다. 양날 도끼를 들고 있는 칸은 머리도 도끼처럼 양 갈래로 묶고 있었다. 잔바크 그레이만 한 덩치를 가지고 있는 칸은 어울리지도 않는 미소를 함박 지었다.
“여기서 기다리는 것도 재미없구요. 제가 가서 찾아보면 좋잖아요.”
“그래! 칸이 갔다 오면 되겠네!”
칸의 옆에서 더욱 비교되는 홀쭉한 몸의 파그노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맞장구 쳤다. 잔바크는 혀를 끌끌 찼다.
“오빠란 사람이 어떻게 여동생을 보내나?”
파그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칸이 나보다 강한 걸 어쩌겠나.”
“그래요. 제가 오빠보다 더 잘 싸운다구요!”
잔바크 그레이는 두 사람을 어이없이 번갈아 보다 헬리시타로 고개를 아예 돌려버렸다. 이제는 무슨 소리를 하던 듣지 않을 생각이었다.
“잔바크! 칸을 보내게!”
“그래요! 제가 갈게요!”
“잠깐만!”
잔바크 그레이는 두 사람을 막으며 손가락으로 헬리시타를 가리켰다.
“저기! 저게 뭐지?”
“으음. 내가 보겠네. 내가 눈이 좋거든.”
“그래요. 우리 오빠는 싸움은 나보다 못하지만 시력은 정말 좋아요.”
“그렇지? 내가 시력이 좋지?”
“그럼요! 오라버니는 눈이 정말 좋아요!”
“하하. 그럼 이제 봐 볼까?”
참다못한 잔바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거 연기 아냐?”
파그노는 그제야 손을 눈 위로 척 갖다 대고는 얼굴을 쭉 내밀었다.
“응. 눈 좋은 내가 보기로는, 연기가 확실한데?”
“연기?”
“그래. 연기라네. 눈 좋은 내가 보았을 때 저건 틀림없이 밥 짓는 연기라네.”
“아.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네요.”
“그렇군.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군.”
남매는 배고프다며 연신 말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잔바크 그레이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아니야! 저건 사죄의식을 시작하는 연기야!”
남매는 흠칫하더니, 곧 다시 해맑아졌다.
“무슨 소린가?”
“밥 때니까 불을 지피는 거래요.”
“그래. 그런 거라니까. 칸, 우리도 식사를 해야 하지 않겠어?”
“네. 배고파요.”
“아니야! 틀림없어! 아까부터 헬리시타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그리고, 봐! 연기도 저기 중앙에 인카르 신전 쪽에서만 나잖아! 분명히 사죄의식이 시작된 거야! 가자! 어서 가서 검성 슈마트라 초이님을 구해드려야 해!”
잔바크 그레이는 서둘러 검을 집어 들고 다른 병사들을 일으켜 세운 다음 남매에게 매섭게 말했다.
“너희들은 안 갈 거야?”
파그노는 쭈뼛쭈뼛 검을 들었다.
“그렇지만 아이언 테라클님이 나타나지 않으셨네!”
“아이언 테라클님은 안에 들어가서 찾도록 하지!”
“그렇지만 말이야!”
“자! 어서 가자!”
“잔바크! 그런데 말이야!”
“파그노! 잘 들어! 이제부터는 정말 전쟁이 시작되는 거라네! 제노아와 헬리시타의 전쟁이! 제노아가 이기면 슈마트라 초이님도 구할 수 있고, 더 이상 인카르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우리는 빨리 저기 헬리시타 성으로 들어가서 늙은 마법사들과 싸워야 하는 거야! 알겠나?”
잔바크 그레이의 광적인 모습에 얼떨떨해진 파그노는 고개를 여러 번 딸각거렸다.
“너무 늦어버리면! 듀스 마블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단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