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트 샤인은 먼지가 지독히 쌓여 있는 돌벽을 툭툭 건드려 보았다. 울림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나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일부러 막아놓은 듯 했다.
목적했던 크레스포로 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했지만, 지금까지 기껏 고생해서 걸어온 길의 끝은 작은 틈새 없이 꽉 막혀져 있었다. 결계였다.
누트 샤인은 잠시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이제 와서 다시 파르카 신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제길. 철저하게도 설치 해 놓았군.”
누트 샤인은 어쩔 수 없이. 크레스포로 향하는 길이 아닌, 다른 갈래 길로 향했다. 뒤로 갈 수 없으니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누트 샤인은 터벅터벅 지친 몸을 이끌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온 만큼 걸어가자, 곧 희미한 빛이 앞쪽에 드러났다.
누트 샤인은 기분 좋게 걸어갔다. 간만에 만나는 빛이었다. 노라크 동굴에서부터 계속 빛을 만나지 못했던 누트 샤인은 쑤셨던 어깨가 절로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이곳은 어디지?”
누트 샤인은 조심스레 발을 빛으로 내놓았다.
누트 샤인은 다크 홀 통로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간만의 빛이 내리쬐는 이곳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누트 샤인은 혹시라도 갑자기 나타날 사람을 만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신중하게 발을 디뎠지만, 곧 그것이 별 소용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근처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자 고약한 냄새가 집안 가득히 진동하고 있었다. 파리와 함께 부패해 가는 시체를 내려다보며 누트 샤인은 이 곳이 이미 이계의 오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땅의 색도 바기족 촌락의 것과는 전혀 틀렸다. 붉다 못해 거뭇거뭇하고 푸른 녹이 스며들은 것처럼 보이는 땅은 이곳이 죽음의 대지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성장이 멈춘 듯해 보이는 주변의 동식물들은 조금씩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 흙을 만져 본 누트 샤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제대로 가고 있는 모양이야.”
크레스포는 이계 오염의 근원지였다. 땅과 식물들까지 이 정도로 희생될 정도라면 강력한 오염이 바로 근처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거기 누구냐?”
누트 샤인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 보았다. 가까운 곳에 낫을 든 사내가 눈을 멀건이 뜨고 있었다. 누트 샤인은 재빨리 공격해 볼까 생각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낫을 든 사내의 푸르스름한 피부와 그 위에 듬성듬성 자리 잡은 낯설지 않은 반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흉측한 냄새가 그 사내의 정체를 말해주고 있었다. 누트 샤인은 슬슬 다가가며 물었다.
“바기족인가?”
멀건 눈의 사내는 잠시 후 대답했다.
“뭐, 특별히 바기족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그렇게 분류되는 모양이더군.”
사내는 뜸을 좀 더 들이더니, 누트 샤인에게 부르는 손짓을 했다.
하얀 모래를 뭉쳐 지은 것 같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은 꽤나 조용했다. 지금껏 누트 샤인이 여행을 다녔던 그 어떤 곳들보다도 사람의 모습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이상한 곳이기도 했다.
“데네브는 처음이오? 클로비스?”
자신을 마블라이라고 소개한 사내가 물었다.
누트 샤인은 자신의 본명을 가르쳐 주지 않고, 파르카 신전에서 자신이 찌른 클로비스의 이름을 갖다 대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클로비스 샤인이라는 이름은 자꾸만 떠올라 누트 샤인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소.”
마블라이는 누트 샤인에게 빵과 우유를 건넸다.
“딱딱하긴 하지만 먹을 만은 할 거요.”
“여기, 당신 혼자요?”
“엥?”
“이 마을 말이요.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군.”
“하하. 아니, 여기는 데네브라서 그렇소.”
“데네브라서?”
“모르나? 데네브. 아르데코들의 고향 말 일세.”
마블라이는 누트 샤인과 마주 앉아 빵을 집어 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은 다들 집에서 작업하느라 이렇게 조용한 거지.”
“그렇지만 뛰어 노는 아이들마저 없다는 건.”
“죽은 마을이지.”
누트 샤인은 심드렁하게 말해버리는 마블라이에게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소? 나를 봐서도 알겠지만, 여기는 이미 극도로 오염된 곳이오. 아. 그렇다고 여기 사람들이 다 나처럼 괴물이란 말은 아니오. 하지만.”
마블라이는 고요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스켈리톤 폰이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저런 광경이 흔한지 마블라이는 별로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스켈리톤 폰도 이 마을과 그렇게 잘 어울려 보일 수가 없었다.
“저런 것들과 어울려 사는 이곳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살 데가 아니지.”
“공격은 안 하오?”
“뭐,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저것들도 그냥 가만히 있소. 물론, 마을 밖으로 나가면 사정없이 달려들기는 하지만.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고. 아르데코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인 셈이지.”
누트 샤인은 눈을 내리 깔고 빵을 우걱우걱 씹었다. 딱딱한 빵은 너무나 간만의 것이라 몇 십 번을 곱씹어도 단맛이 질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근데 여기는 왜 온 거요?”
누트 샤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예술품 몇 가지를 좀 얻으려고 왔소.”
마블라이는 그 말을 듣고 기분 좋게 웃었다.
“아하하. 그래도 아르데코에 대해 아주 모르지는 않은가 보군. 그래. 우리 아르데코들은 예술이라는 말에 미친 사람들이지.”
남은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켜 마신 마블라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에 늘어져 있는 진열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 좀 보자……. 아르데코들은 말이오. 일각에서는 무기를 제작하는 대장장이라고 비웃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진열장은 오랫동안 열지 않았는지 먼지가 풀풀 날렸다.
“병장기는 말이지. 사람과 같은 것이오. 다들 잘 몰라서 그렇지만, 녀석들은 감정도 있고 표정도 있단 말이야. 그래서 그것들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넣을 때마다 아르데코들은 예술적인 희열을 느끼는 거지…… 이건 어떨까…….”
‘괴짜로군.’
어느 새 자리에서 일어 선 누트 샤인도 작디작은 체구로 뒷짐을 지고 병장기들을 차례로 구경하기 시작했다.
금과 미스릴로 만들어진 장검이 주였고, 손목에 차는 보호구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모두 길고 두꺼운 것들뿐이라 누트 샤인이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마블라이라는 아르데코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얼마 남지 않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숙였던 허리를 곧게 펴들었다.
“아무래도, 하나 만들어야겠군.”
이렇게 말한 마블라이는 의자에 걸쳐 있던 수건을 들어 손을 닦았다.
“자네는 같은 바기족이니 내 직접 손을 써보겠네.”
아르데코는 트리에스테 대륙의 병장기제작자였다.
트리에스테 대륙 각지에 퍼져 있는 그들은 부자 도시에서는 예술가로서 부와 명예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병장기가 단순한 무기로 보여지기 보다는 예술로 평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예술적 가치를 폄하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했다.
우연히 만난 성격 좋은 바기족 덕택에 예술품 하나를 얻게 된 누트 샤인은 흔쾌히 허락했다.
‘저 놈을 죽이지 않길 잘했어. 덕분에, 좋은 암기가 생기겠군.’
누트 샤인은 여러 모로 좋았다. 다크 홀의 통로를 통해서 크레스포로 바로 가지는 못했지만, 데네브는 크레스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또 바기족 아르데코를 만나 암기까지 얻게 되었다. 예상보다도 끔찍하고 열악한 환경은 이계의 영향에 대해 누트 샤인을 새삼 놀라게 만들었지만 어쨌든 여러 가지 이득을 본 것이었다.
“그런데, 당신 진짜 이름은 뭐요?”
누트 샤인은 마블라이의 말에 놀라 눈을 부릅떴다. 반사적으로 몸속에 덕지덕지 가라앉아 있던 촉수들이 팽팽히 섰다.
“클로비스가 진짜 이름이 아닌 것쯤은 알아챌 수 있소. 아르데코들은 예민하거든. 뭐, 예술 하는 사람들이 원래 다 그렇지 않소? 허허허.”
그 말에 누트 샤인은 마블라이를 똑바로 노려보며 답했다.
“피차 마찬가지잖소?”
“응?”
“마블라이는 아르데코를 수호하는 신이지.”
“아아. 이런. 들켜버렸군.”
“어차피 이름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오.”
누트 샤인은 이 말을 자신의 가슴에도 깊게 새기고는 클로비스 샤인이라는 이름의 얼룩을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