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시려구요?”
에바는 자신도 모르게 감히 데비나에게 소리쳤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대답 없이 가만히 가리온을 살폈다.
“리클레임.”
따뜻하고 넓은 빛이 검푸른 다크 홀의 통로에 퍼져나갔다.
“치료를!”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만히 손을 거두어 들였다. 하얗게 질려 있던 가리온의 얼굴은 서서히 핏기가 돌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이 분은 죽을 뻔 했습니다!”
“죽지 않았잖아.”
에바는 데비나의 거침없는 태도에 질려버린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정말 모르시겠어요? 이 꼴 좀 보세요.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말 큰일이 일어났을지도 몰라요!”
에바는 방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가리온이 손에서 뻗어 나온 빛으로 괴물을 쓰러뜨리는 순간에는 에바도 몹시 놀랐다. 일행을 괴롭히던 카타스트로프의 모습도 함께 부수어져 허망하게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놀란 에바가 가리온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그 위로 데비나가 먼저 가리온에게 다가가 치료를 했다. 에바는 자신이 가리온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게 분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세요?”
“속셈이라니?”
“죽을 수도 있다는 거 데비나님이 제일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뿐만 아니라, 그런 저주를 듣도록 만든 것도. 너무하세요.”
“저주가 아니라 예언이야.”
“예언을 듣다가 죽을 뻔 했다구요!”
“이렇게 된 게 그의 운명이라면?”
비나엘르 파라이는 차가운 눈으로 에바를 쏘아보았다. 에바는 이렇다 할 대답 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저 청년은, 네가 감당할만한 인물이 아니야.”
“네?”
“더 이상은 봐주지 않겠다.”
데비나의 말에 에바는 흠칫했지만, 곧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당신이 가리온을 죽이고 말거야!'
에바는 그것을 뱉어내지 않도록 참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에바의 분이 가리온에게 전해진 듯, 가리온의 몸이 털썩거렸다. 가리온은 점점 숨을 급하게 배어내더니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아! 안돼!”
“가리온! 괜찮아요?”
가리온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하얀 검은 사라지고 없었다. 가리온은 어리둥절했다. 데비나가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검이야.”
가리온은 데비나를 바라보았다.
“광검이라고도 하지.”
“알로켄족이 내뿜는?”
가리온이 불쑥 말했다. 누트 샤인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것이었다. 가리온은 자신이 말하고도 깜짝 놀랐다. 믿지 않으려 했던 것을 이미 가리온은 가슴 속 깊이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 맞아.”
비나엘르 파라이는 침착하게 답해 주었다. 만족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되돌아온 말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알로켄족이 아닙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확신하지?”
잔뜩 엉망이 된 자신을 돌아보던 가리온은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이런 주제는 피하고 싶었다.
“그랜드 폴을 일으킨 알로켄족 따위는 아니라구요!”
“그 알로켄의 피 덕분에 자네가 지금 숨쉬고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할 텐가?”
”아하하.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역사에서도 알로켄족이 모두 상계로 도망쳐 버렸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역사가 기록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뒤엉킨 역사는 조작되기 쉽지.”
비나엘르 파라이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칼리지오 밧슈라는 자가.”
“그 이름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비나엘르 파라이는 다크 홀이 쩡쩡 울리도록 고함쳤다.
가리온은 흠칫하며 데비나를 바라보았다. 매서운 눈빛이었다. 그래도 가리온은 자신이 알로켄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가리온은 지지 않고 가슴 깊이 가장 궁금했던 일을 토해냈다.
“그렇다면 제 아버지는 도대체 누굽니까? 알로켄의 피를 이어받은 또 다른 그 남자는 누구란 말입니까!”
“뭐라고?”
“네?”
비나엘르 파라이와 에바는 거의 동시에 눈을 껌뻑거렸다. 가리온은 그 넓던 어깨를 깊게 움츠리며 힘겹게 말했다.
“저는. 아들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바기족은 내가 아들이기 때문에, 검에서 빛을 내뿜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궁금함을 참지 못한 에바가 나섰다.
“아버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그러니까 제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들과 이런 상황들은 도무지.”
“자네는 자신이 알로켄족이라는 것은 부정하면서, 슈마트라 초이는 알로켄이라고 생각하고 있군.”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리온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광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뭐라고?”
“어렸을 적에, 뒤뜰에서 검술 연습을 하는 아버지를 봤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얀 눈부시게 하얀. 빛이었습니다.”
“아!”
비나엘르 파라이는 탄식하며 가리온을 향해 주저앉았다.
“정말로, 살아있었구나!”
비나엘르 파라이의 눈에 다른 것은 들어오지 않는지 혼자 중얼거렸다.
“드디어, 그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 드디어!”
데비나의 모습에 에바는 어리둥절해 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에바는 가리온과 데비나에게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지만, 섣불리 물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가리온은 매우 근심스러워 보였고, 데비나는 무언지 모를 기쁨에 넋이 반쯤 나간 것 같았다.
“저, 이제 어떻게 하죠?”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린 병사들이 세 사람 주위로 다가섰다.
에바는 이대로 갈 수 없었다. 질척거리는 습기가 가득 찬 바닥을 밟으며 가리온과 데비나 근처로 다가 간 에바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서 누트 샤인을 찾죠.”
그러나 에바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가리온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고, 데비나는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에바가 한마디 더 하려는 찰나, 비나엘르 파라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니, 더 이상 찾지 않아.”
“네?”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리온의 어깨를 잡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당장 헬리시타로 가야 한다.”
가리온은 미동하지 않았다.
“슈마트라 초이가 듀스에게 잡혀 있어.”
이 말에 가리온은 정신이 반짝 나는 것 같았다.
“가서 모든 의문을 풀고.”
다음 말을 하는 순간 비나엘르 파라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의 일을 세워야지.”
말을 마친 비나엘르 파라이는 바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털었다.
“너도 갈 테냐?”
에바는 그것이 곧 자기에게 묻는 말임을 알아차렸다. 잠시 뒤를 돌아 본 에바는 약간 망설이다가 과장되게 대답했다.
“물론, 당연히 저도 가야죠! 아직 누트 샤인을 잡지 못했잖아요!”
간간히 한숨 소리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파르카 신전의 병사들은 에바를 따르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훗,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너도 가는 게 좋을 거다. 가리온 일어나라. 가야지. 아버지를 구하러.”
가리온은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며 일어섰다.
부끄러운 자신이 검성인 아버지를 구하러 간다는 것이, 또 아버지가 듀스 마블에게 잡혔다는 것이 그렇지 않아도 혼돈스러운 마음을 더욱 세차게 채찍질했다.
“서둘러야 해. 듀스는 사죄 의식을 벌일 생각이야.”
“사죄의식?”
가리온과 에바가 놀라 돌아보았다.
“그래. 트리에스테 최초의 사죄의식을 계획하고 있지. 일단 내가 막아 두었지만. 워낙 성미가 급해서 말이야.”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헬리시타로 가는 길은 왼쪽이다.”
가리온은 서둘러 망가진 인카르의 검을 들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은 어느 새 헬리시타를 향해 있었다. 아버지를 만나게 되어 또 어떤 혼란을 겪게 될지 몰랐지만, 우선은 그저 아버지에게로 뛰어 가고 싶은,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누트 샤인은 살살 발을 옮겼다. 가뜩이나 작디작은 누트 샤인이 보폭을 줄여 걷는 것은 꼭 느릿느릿하게 기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누트 샤인은 괴물의 잔해를 바라보고 주위를 살피었다. 가리온과 비나엘르 파라이, 그리고 에바라는 궁수가 헬리시타로 향한 통로는 어느 새 주위의 벽처럼 막혀 있었다. 누트 샤인은 비나엘르 파라이가 손을 쓴 것임을 짐작했다. 아직 어린 궁수는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지만, 노련한 비나엘르 파라이는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비나엘르 파라이는 누트 샤인을 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주치려 할 경우에는 피해 주기도 하였다.
“도대체 속셈이 뭘까.”
누트 샤인은 일행이 사라진 벽으로 다가가 손을 스윽 넣어 보았다. 아직 물컹물컹했다. 이것도 필시 비나엘르 파라이가 자신을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일 것이었다.
“퉷! 알로켄을 배신한 년!”
누트 샤인은 침을 뱉으며 왼편을 쏘아 보았다.
“네 년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만, 절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진 않을 테다.”
누트 샤인은 총총히 오른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다면 이제, 크레스포로 가볼까. 크크크.”
누트 샤인이 발걸음을 옮기면서 웃음소리는 점점 작게 울렸다. 네 사람이 사라진 통로는 단단하게 막혀 다른 벽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다크 홀은 그렇게 다시 어둠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