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orak - 이교도의 유물 - 2장. Griffon. 그리폰의 소녀
| 20.12.16 12:00 | 조회수: 1,513


원래부터 아레스 숲은 요정의 정원이라고 불리 울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한 숲이었다.

아레스 숲의 청량한 모습은 트리에스테 대륙의 정원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이계의 오염이 시작되면서 숲은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공포의 지역으로 변해 버렸다.

그런데 이계의 오염이 시작된 크레스포와 아레스 숲은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위치상으로 크레스포와 아레스 숲 사이에는 하이하프라는 높은 설원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강력한 괴물이라 해도 하이하프 설원을 넘어 아레스 숲까지 내려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사실 이계의 오염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 인카르 원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트리에스테 대륙의 안정화를 원한 인카르 교에 의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지만, 몇 십 년 전 이 일이 트리에스테 전체에 알려지게 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듀스 마블의 원정이었다. 인카르 104년, 이례적으로 기사단이 아닌 마법사 듀스 마블이 크레스포로 원정을 떠났다.

듀스 마블은 이계의 오염이 미스릴 생산지 크레스포로부터 발생되고 있다는 사실을 공포했고, 직접 인카르의 마법사들을 이끌고 원정을 떠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승리는 당시 젊은 사제였던 듀스 마블을 신관 조디악으로 만들어 주었다.

듀스 마블이 조디악에 합류하자마자 손댄 일은 브라이켄 성에 결계를 치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트리에스테의 재난, '그랜드 폴'을 되돌리지 말자는 의미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예전엔 북쪽의 설원지대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아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아레스 숲은 일반인들은 다닐 수 없는 곳이 되었고, 그대로 트리에스테는 평화로운 듯 했다.

그러나 40여 년이 지난 지금 오염체들은 다시 나타났고, 이번에는 하이하프 설원을 넘어 아레스 숲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인카르는 결국 크레스포에서 오염이 발생되었다고 공표했고, 이 모든 상황을 노라크 잔당들의 소행이라 못박았다.

그런 아레스 숲 위에 그리폰이 한 마리 나타났다. 그리폰은 수풀 위 드넓은 하늘에 커다란 원을 그리며 몇 번인가 날아다니다가, 곧 검은 자갈밭처럼 보이는 곳에서 맴돌았다.

지난 밤, 스파이더 퀸들이 습격한 바로 그 곳이었다.

“저기인가 봐.”

시에나는 가녀린 하얀 손가락으로 그리폰의 갈기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리폰은 크게 한번 울더니 하강하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하늘을 휘젓는 그리폰은 하강 역시 거침이 없었다. 이계의 오염이 아레스 숲까지 넘어왔다지만, 아직 하늘에서 그리폰을 당해 낼 오염체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폰의 날갯짓에 시에나의 검보랏빛 머리칼은 바람결처럼 휘날렸다. 빠른 속도로 아레스 숲에 착지하려던 그리폰이 난데없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시에나가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간밤의 잔해들이 곳곳에 널려져 있었고, 땅 위는 녹색 빛깔의 액체로 뒤범벅이었다. 바닥에 고인 독 때문에 땅으로 내려앉지 못하고 여전히 공중에서 퍼덕이는 그리폰을 탄 채, 시에나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울창한 수풀 사이로 시체더미 한 가운데서 검을 휘두르는 사람이 보였다. 누구인지 확실치 않았으나, 그의 손에서 번뜩이는 검만큼은 어떤 것인지 알아 볼 수 있었다.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저 은빛은 크루어의 빛이었다.

크루어는 기사들의 상징이었다. 인카르가 생긴 이래로, 기사들은 크루어로 인카르를 지켜주었다.

그것은 크루어와 기사들의 피의 계약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부심이 강한 기사들이었지만 크루어를 통해 수호 계약을 맺어 인카르를 보호했던 것이다.

가리온은 크루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크루어의 맹세의 검기가 온 몸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인카르의 신관들과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 그리고 어머니 디에네 비노쉬가 떠올랐다. 이 모습을, 인카르 청기사단장의 크루어를 든 모습을 자랑스럽게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래야만 슈마트라 초이의 진정한 자식으로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리온이 청기사단의 검 크루어에 흠뻑 빠져들어 있을 때, 하늘에서는 거대한 바람이 일었다. 그것은 날씨가 빚어낸 바람이 아니라, 그리폰의 날개에서 생성되는 바람이었다.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와 그리고 앞다리, 황갈색의 몸통에 사자의 뒷다리를 가진, 태양의 날개로 불리는 그리폰이 빠른 속도로 날아와 가리온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거대한 그리폰의 머리 뒤에서 시에나가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시에나의 눈 앞에 얼굴과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갈색 머리의 기사가 서 있었다. 시에나는 가리온의 푸른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크루어에 시선을 멈추었다.

가리온도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에나를 바라보았다. 윤기 나는 검은빛의 긴 머리에, 같은 색깔의 눈동자. 새하얀 피부가 매우 여려 보이는 사람이었다. 시에나가 입은 오클라스를 보고, 그리폰을 타고 온 사람이 마법사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뒤로 한 채 듀스 마블을 따라 인카르 보육시설을 나섰을 때, 시에나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지위와 신분을 드디어 갖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 인카르 보육시설에 들어왔는지, 시에나 자신이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일년에 몇 차례씩 보육시설을 방문하는 인카르의 신관 조디악을 보면서 시에나는 매일같이 다짐했다.

‘나도 저런 신관이 되겠어.’

코 묻은 얼굴로 마냥 흙먼지만 일으키며 장난치는 또래 아이들의 모습에서, 시에나는 더럽다는 느낌밖에 받을 수 없었다.

그녀는 하루빨리 이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보육시설에서 나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곳에서 꿈을 키우며 살고 싶었다. 그때부터 시에나는 늘 인카르 신전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해왔다. 어린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보육시설에 마련되어 있는 조그마한 도서관에 구비된 모든 책들을 섭렵했다. 시에나는 특히 또래 아이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흑마법과 소환마법에 능통하게 되었다. 주위의 요소들을 끌어들여 주문을 외운 자의 힘으로 생성되는 마법에,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시에나는 점점 빠져들었다. 마력이 차츰 쌓이자, 기회는 찾아왔다.

“시에나, 네가 가겠니?”

“나보고 고작 하녀로 가라구요?”

시에나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데모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보육시설의 원장 데모라는 시에나의 당돌함에 당황했지만, 곧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그녀를 타일렀다.

“넌 인카르의 보육시설에서 키워졌어. 당연히 이분들을 도와드려야지.”

“인카르를 위해 목숨을 바쳐 돕는 방법도 있어요.”

데모라는 어이가 없었다.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열 세 살짜리 여자아이가 할 말이 아니었다.

“이런, 넌 여자아이잖니. 그런 건 정규교육을 받은 기사들이 하는 거란다.”

“전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요.”

“이, 이런 몹쓸 애가! 네 분수를 알아야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른 아이를 찾아 보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 마법을 할 수 있습니다.”

시에나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다른 아이를 찾겠다고 말하던 데모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에나를 내려보다가 말을 이었다.

“네……. 네가……. 무슨 마법이야. 우리는 너에게 그런 것 가르친 적 없어. 신관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용서할 수가 없구나!”

“포스 엘리멘터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인카르의 신관 듀스 마블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시에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그 여유로운 모습이 듀스 마블의 커다란 키만큼이나 까마득히 높아 보였다. 시에나가 이를 악물며 치맛자락을 잡는 순간, 듀스 마블이 입을 열었다.

“원장님의 말씀대로 다른 아이를 찾아야겠습니다. 이 아이는 아무래도 인카르의 하녀로 쓰기는 힘들 것 같군요.”

시에나는 치맛자락을 놓지 않았다. 눈동자도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정지된 것만 같았다. 데모라에게 대들던 것과는 반대로, 시에나는 아무 소리 없이 그저 듀스 마블의 결정을 듣고 있었다.

그래도 눈물은 어쩔 수 없이 흘러내렸다.

“이 아이는 제 이름으로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예?”

“시에나라고 했나요? 저 아이를 데려가면 매우 재미있을 것 같군요.”

“예? 하지만…….”

“저는 인카르의 신관이자 조디악의 일원입니다. 제가 데려가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 문제는 없습니다만…….”

곧 시에나만한 꼬마 여자아이가 오자, 듀스 마블은 데모라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시설을 나섰다.

시에나가 문간에서 듀스 마블을 바라보았지만 듀스 마블은 눈빛을 건네지 않았다. 하녀로 가게 된 여자아이는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마냥 즐겁게 따라 나섰다. 시에나는 망설이는 듯 하더니 어안이 벙벙한 데모라를 잠시 바라보다 그대로 나가버렸다.

그날부터 시에나는 듀스 마블의 저택에서 10년 정규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3 년 만에 모든 공부를 마쳤다. 그리고 일 년 동안 트리에스테 대륙 각지를 여행한 뒤 마법사로서 당당히 인카르 신전에 입성했다. 시에나 자신이 조디악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길을 올라가야 했지만, 그 길을 끝까지 오르는 것도 멀지 않아 보였다.

듀스 마블이란 든든한 배경이 있었고, 시에나의 정치적 이해감각 또한 날카롭고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열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의 시에나를, 인카르의 조디악 중 누구도 반대하며 나설 수 없었다. 듀스 마블은 이런 시에나와 항상 함께 했다.

“노라크 동굴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이계 오염을 막기 위해서나, 반군들을 막기 위해서나 꼭 우리 인카르가 차지해야 할 곳이야……. 청기사단을 보내기는 했지만 어쩐지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구나. 휴…….”

“별의 위치가 좋지 않아요.”

“네가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거로군요. 목적지는 노라크 동굴인가요?”

“일단 아레스 숲으로 가거라.”

“빨리 출발해야겠네요.”

"명심해라. 노라크 동굴을 선점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다른 세력들이 그곳에 자리 잡게 되면 우리 인카르로서는……."

좀처럼 근심스러운 표정을 하지 않던 듀스 마블은 얼굴에 난색을 드러내며 말끝을 흐렸다. 평소와 다른 듀스 마블의 모습이 이상하게 생각되었지만, 시에나는 그 길로 그리폰을 타고 아레스 숲으로 향했다.

시에나가 아레스 숲에서 크루어를 들고 있는 기사를 만났을 때, 그 옆에는 파란 깃털의 투구를 쓴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시에나는 기사단장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번 원정을 위한 집회에서 그가 크루어 앞에 맹세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기사단이 무참히 당할 것을 짐작하고, 그리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신 걸까.'

시에나는 듀스 마블의 어두운 표정이 잠시 생각났지만, 일단 눈 앞의 일을 먼저 처리하기로 마음먹고, 크루어를 잡고 있는 새로운 기사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지만, 푸른 눈동자의 눈빛만은 선명하게 살아 있었다.

“당신은 크루어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군요.”

가리온은 청기사의 검 크루어를 알아보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폰과는 어울리지 않게 매우 청순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누구십니까?”

“성격이 급하시네요. 인카르의 전령 시에나입니다.”

시에나가 살짝 웃자, 살랑 바람이 불었다. 펄럭이는 치맛자락에 인카르의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밤새 습격이 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크루어의 본래 주인은 당한 것 같군요. 다른 생존자는 없나요?”

“아직 다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없을 겁니다.”

주위를 한번 둘러 본 시에나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크루어의 새 주인은 굉장한 실력을 가지신 분이네요.”

가리온도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온통 스파이더 퀸의 시체들이었다.

‘밤새 이런 것들과 싸우다니!’

검을 들고 있는 손에 저절로 힘이 가해졌다. 가리온은 크루어를 들고 있는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보았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이번에 새로 기사단에 들어 온 가리온입니다.”

“그렇군요. 가리온님은 이 원정의 목적을 알고 계시나요?”

“이번 원정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밀교 노라크 단의 잔당들을 해치우기 위한 원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잘 알고 계시군요. 자아 그럼, 임무를 완수하러 갈까요?”

시에나가 가리온에게 손을 내밀자, 가리온은 그 손을 잡고 그리폰에 올랐다. 가리온에게 그리폰은 처음이었다.

가리온이 앉자 그리폰이 약한 신음소리를 냈다. 스파이더 퀸의 녹색 액체가 가리온의 부서진 갑옷에 그대로 묻어 있어 그리폰이 아픔을 느꼈던 것이다. 가리온도 그리폰의 빳빳한 털이 상처에 닿아 쿡쿡 쑤셨다.

“이런, 우선 상처를 치료 해야겠군요.”

시에나는 벌떡 일어나 가리온을 향해 마주보고 섰다. 시에나는 잠시 그윽한 눈길로 가리온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두 눈을 감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시에나의 두 팔이 바람에 동화되는 듯 자연스럽게 모아졌고, 주문을 외우는데 열중해서인지 중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러나 가리온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마지막 단어뿐이었다.

“……. 리클레임!”

시에나의 치료 주문이 완성되자, 뜨거운 바람이 불어 날리는 것 같더니 가리온을 둥글게 감쌌다.

가리온은 휘황한 눈부심에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더니 마음이 점점 편안해졌다. 좋은 기분이었다.

“이제, 그리폰을 잘 탈 수 있겠죠?”

“대단하군요!”

처음으로 마법을 접해 본 가리온은 눈앞의 일이 믿기지 않았다. 상처는 물론이고, 자신의 갑옷도 깨끗해져 있었다. 가리온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시에나는 다시 그리폰에 앉아 갈기를 살짝 잡아당겼다.

“꼭 잡으세요!”

그리폰이 소리를 길게 외치며 하늘로 차오르자, 화르륵 시원한 바람이 쏟아져 내려왔다. 공중에서 내려다본 간밤의 전장은 마치 검은 자갈밭과도 같았다. 뒤를 돌아보니 브라이켄 성이 아주 조그맣게 눈에 들어왔다. 브라이켄 성과 아레스 숲 모두 지난밤과는 달리 매우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지금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가리온은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저기가 노라크 동굴이에요.”

하이하프 설원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아레스 숲이 끝나는 지점이 있었다.

시에나가 가리킨 곳은 바로 그 곳, 노라크 동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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