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 두 번째의 힘 - 13장. Infiltration. 잠입
| 20.12.23 12:00 | 조회수: 975


“아까 그 친구 괜찮아 보이지 않았어?”

“그래 봤자 인카르 녀석인걸.”

“그래도. 우리 편으로 올지도 모르잖아.”

“하긴 그렇지. 아까 클로비스 대장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더군.”

“그 녀석. 인카르 교단이 얼마나 재수 없는지 알게 되면 당장 그 헐렁한 갑옷 따위는 벗어 던질 거야.”

“그래.”

불침번을 서고 있는 두 경비병은 신전을 올라오는 계단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멀리 하이하프 설원에 달빛이 반사되었기 때문에 횃불을 밝히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밝았지만, 그래도 설원이 둘러쳐진 밤은 싸늘하기에 병사들은 추위를 달래 줄 모닥불을 앞쪽 가까운 곳에 지폈다.

“이런 밤에도 이렇게 보초를 서야 하니.”

병사 하나가 말문을 다시 열며 가슴 쪽에 감추어 두었던 가운데가 잘록한 가죽 통을 꺼내 들이켜 마셨다. 원래 용도는 물통이지만 그 안에는 감칠 맛 나는 포도주가 들어 있었다.

“이봐. 그래도 보초 서는 건데 그렇게 술을 마시면 안 되지.”

“크흐. 안되기는 무슨. 마실래?”

핀잔을 주던 병사는 마주 웃으며 물통을 받아 들었다.

“따스하고, 나른하고. 목도 축이고.”

포도주를 받아 든 병사는 목을 축이고 말을 받아 넘겼다.

“저기가 바로 크레스포인데 말이지.”

“그러니까. 누가 믿겠어? 이 설원 바로 건너편에 우리 고향인 크레스포가 있다고.”

두 병사는 같은 곳 출신으로 트리에스테 대륙 이계 오염의 근원지인 크레스포, 바로 그 곳이 둘의 고향이었다.

“가끔 죄책감이 들기도 해.”

“응?”

“고향 땅에 그대로 남았어야 했다는 생각.”

“아서라. 우리라도 이렇게 살아남아야, 나중에라도 다시 고향으로 가지. 지금 돌아가면 뼈도 못 추려.”

병사는 유난히 감상적이 되어 버린 고향 친구의 어깨를 툭툭 치며 포도주를 다시 주인에게 건네었다.

“하지만.”

포도주 주인은 유난히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렇잖아. 정기적으로 노라크 동굴에 가서 이계 생물들하고 싸우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진행된 건 없잖아. 그리고. 솔직히 크레스포에 남아 있던 우리 가족들은 아마 이미 다 죽어버렸을 거라구.”

두 명의 병사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었다.

크레스포에 연이어 오염이 발생하자 인카르에서는 크레스포를 봉쇄하는 조치를 취했다. 헬리시타, 제노아, 네오스를 비롯한 여타의 도시들은 이 공고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큰 반발이나 저항 없이 그 작업은 척척 이루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정작 봉쇄를 당하게 된 크레스포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크레스포는 철보다 강한 미스릴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아이언 테라클이 금광이 있는 자덴을 발견하기 훨씬 전부터 크레스포에는 많은 광부들이 정착하여 살아왔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미스릴의 생산량 덕분에 하이하프 설원을 끼고 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 때는 헬리시타 다음가는 부자 도시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크레스포에 살던 사람들이 반발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남녀노소, 빈부격차를 가릴 것 없이 크레스포의 모든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묵묵부답의 자세를 취하는 인카르 앞에 크레스포는 곧 죽은 도시가 되어 버렸다.

미스릴의 가격이 급상승하자 많은 미스릴을 보유하고 있던 영주 급의 거상들은 잽싸게 미스릴을 팔아 치운 후, 넉넉한 자본을 가지고 가까운 데네브로 가거나 항구 도시 엘타로 이주하였다. 어떤 이들은 아예 헬리시타로 들어가 버리기도 했다. 거상들은 그렇게 크레스포를 떠나버렸다.

그러나 순수하게 광부였던 사람들은 끝까지 갈 곳이 없었다. 아니 가고 싶어도 갈 여력이나 자금이 없었다. 인카르 교단의 정식 허가를 받은 영주나 거상들만이 미스릴을 소유할 수 있었을 뿐, 정작 힘들게 광산에서 미스릴을 파내었던 농노들에게 떨어지는 돈은 없었다.

힘없는 광부들이 삽을 들고 악을 쓰며 삶의 터전인 크레스포를 지키겠다고 버티는 사이, 인카르의 조디악과 듀스 마블은 크레스포를 둘레로 굳은 철의 결계를 쳐나갔다. 하늘을 에워싸는 듯한 높은 철벽의 결계가 완성될 무렵에는 남아있던 사람들마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 이러다가 이 안에 갇혀 버리는 거 아니야?”

“설마. 그럴 리 없어. 우리가 이렇게 버티면 지들도 어쩌지 못할 거야. 설마 생매장하겠어?”

“그래도. 저길 보라구. 이제는 하이하프 설원도 보이지 않아.”

“나, 나는 아무래도 떠나야겠어.”

“뭐?”

“그럼 여기는 어쩌고?”

“모, 몰라. 나는 살고 봐야겠어!”

두려운 마음에 조급해진 사람들은 한 명씩, 한 명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두껍고 높은 철벽을 지나 크레스포를 빠져 나간 것이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남아있던 몇 백 명은 몇 십 명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사람들의 위화감은 커져만 갔고, 서로 싸우다 죽고 죽이는 일도 생겼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빠지자, 젊은 자식을 둔 부모들은 자신의 아들딸들만이라도 크레스포에서 탈출시키기 시작했다. 자식들을 빼돌린 부모들은 그 다음날 미스릴을 캐던 괭이에 찍힌 채로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도 인카르 교단 측은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크레스포에는 하늘을 가릴 듯한 결계만 나날이 높아질 뿐이었다.

파르카 신전에서 달빛을 받으며 포도주를 마셔 몸을 따스하게 데우는 두 병사도 그렇게 부모님의 희생을 등에 업고 크레스포를 떠난 사람들이었다.

푹-.

“염병할. 뭐가 안정이고 평화야! 우리가 이렇게 된 건 다 빌어먹을 인카르 때문이라구!”

병사는 꼭지를 다시 돌려 포도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서러운 마음으로 두 눈에 가득 고여 버린 눈물을 쓸어버린 그는 쓰러진 동료를 흔들었다.

“뭐야. 술 마셨다고 쓰러진 거야? 이봐. 일어나. 이건 포도주야. 남자라면 말이야. 마셔도 취하면 안 되는 그런 술이라구. 어서 일어나. 일어나고! 으응? 모야? 포도주를 쏟았나? 칠칠치 못하게 시리.”

계단에 붉게 고여 가는 액체를 주섬주섬 모으던 병사는 곧 그 액체가 포도주가 아님을 깨달았다. 천천히 옮긴 시선 끝에, 쓰러진 병사의 목을 타고 찐득한 것이 대리석 계단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피, 피, 피다! 누, 누구야?”

놀란 손을 더듬거려 황급히 옆에 뉘여 놨던 창을 집어 들은 병사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크크크. 이렇게 소홀히 보초를 서다 보면 죽기에 딱 십상이지. 이래서 인간은 안 되는 거야.”

“뭐, 뭐야? 어디야? 이, 이리 나와! 커억!”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병사는 곧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싸며 계단 앞쪽으로 거꾸러졌다. 지탱할 힘을 잃은 창도 휘청거리면서 주인과 같이 쓰러졌다.

달빛이 가득한 신전 마당은 곧 다시 조용해졌고, 작디작은 몸집을 가진 것이 병사가 쓰던 창을 집어 들었다.

“이건 쓸모가 있겠어. 크크크.”

창대 끝에 달린 뾰족한 날이 긴 대와 분리되어 작디작은 것의 품으로 사라졌다.

에바는 빠르게 발걸음을 띠며 연신 얼굴에 손등을 대었다. 가리온의 방을 나선 후부터 얼굴이 자꾸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서였다.

“아, 바보같이, 내가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지. 아앗!”

에바는 순간 걸음을 멈춰버렸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에바의 등 뒤에 물컹물컹한, 상상만으로도 징그러운 그것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에바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얀 액체가 스멀거리는 촉수. 그것은 분명 다크 홀에서 만난 바기족의 것이었다.

“어느 틈에!”

“크크. 그러게 말이야. 크크.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말이야. 밤길은 좀 조심해야지. 응? 그렇지 않아? 크크크.”

누트 샤인은 소름 끼치는 촉수로 에바의 등을 이리저리 문댔다.

‘벗어나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활은 에바의 방에 고이 놓아져 있었고, 늘 지녀왔던 단검이 가슴 아래 숨겨져 있었다. 에바는 놀라서 입가로 갔던 손을 살며시 내리며 단검을 꺼내야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누트 샤인은 두 번 당하지 않았다.

“이런. 이런. 그 손은 그냥 얌전히 내려놓도록 해. 그 커다란 가슴 한쪽이 푹 꺼지길 바라지 않는다면 말이야. 크크크.”

에바는 별 수 없이 천천히 손을 허리춤으로 내렸다. 어쩔 수 없었다. 이 바기족은 에바가 단검을 소지하고 다닌다는 것을 지난번의 사건으로 알아 버렸다.

‘제길, 이미 눈치 채버렸어.’

에바는 이 순간이 홀로 네오스를 떠나 파르카 신전으로 올 때보다도 훨씬 위험한 순간이란 것을 직감했다. “자. 아가씨. 그럼 이제 날 안내하지.”

“나는 그런 고서 따위 어디 있는지 모른다!”

“몰라? 거짓말을 하는군. 물오른 아가씨가 그러면 안 되지. 크큭.”

“거짓말이라니? 난 정말 모른다!”

“어리석은 인간! 내 촉수로 뼈까지 빨아들이기 전에 냉큼 앞장서라!”

“나, 난!”

“시끄러!”

바기족은 에바의 뒤에 찰싹 붙으며 징그럽게 말했다.

“자, 어서 가라구. 탱탱한 몸이 망가지기 전에 말이야. 크크.”

소름이 확 끼친 에바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방금 전에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온 몸은 부들부들 떨렸지만, 정신만은 하나로 모아졌다. 에바는 쉴 새 없는 생각 끝에 단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다.

‘이리로 가야 해. 클로비스와 가리온이, 가리온이 있는 곳으로!’

에바는 누트 샤인을 뒤로 하고 걸어가면서 될 수 있는 한 발 소리를 크게 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동물의 털로 만들어진 신이라 그런지 바닥에 스치는 소리만이 간간이 났고, 주의를 끌 만한 큰소리를 내기에는 턱도 없었다. 에바의 마음만 점점 더 불안해지면서 어느 새 가리온의 방문 앞에 가까워졌다. 믿을 것은 가리온과 클로비스뿐이었다.

걸어오는 동안 누트 샤인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자신이 위협을 가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여자는 요물이라 어떤 짓을 할지 몰랐다. 알로켄족도 그렇게 배신 당했다. 앞서 가는 에바의 떨림이 심해지는 듯하자 누트 샤인은 다시 한 번 경고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

에바는 침을 꼴깍 삼키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기회는 지금이었다.

“이 방에 있다.”

“여기에?”

누트 샤인은 에바가 의심쩍었다. 이곳까지 군소리 없이 안내해주었다는 것은 뒤에 어떤 꿍꿍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품게 했다. 때문에 누트 샤인은 에바가 직접 문을 열도록 했다.

“아가씨가 직접 문을 열어 봐.”

에바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휴.”

숨소리는 당연히 떨릴 수밖에 없었지만 큰 호흡을 한 뒤 에바는 있는 대로 힘을 주어 문고리를 세게 밀었다. 이제 안에 있던 두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달렸다.

“가리온! 클로비스!”

먼저 알아 챈 것은 가리온이었다. 가리온은 부들부들 떨며 경직되어 서 있는 에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해버렸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가리온은 곧바로 자신의 검 크루어를 집어 들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눈치를 챈 것은 가리온만이 아니었다. 누트 샤인 역시 문이 열림과 동시에 에바가 방안의 무언가에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이 계집애가! 수작을 부리려고!”

누트 샤인은 서둘러 에바 뒤로 바싹 붙으며 경계를 취했다. 뒤늦게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느낀 클로비스도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트 샤인이 워낙 작디작았기 때문에 잘 보지 못했던 클로비스가 물었다.

“에, 에바”

“내, 내 뒤에!”

에바의 금빛 뺨에 어느 새 식은땀이 돌돌 돋았다. 에바는 조금이라도 그들 곁으로 가고 싶었다. 촉수에서 뭉겨 나온 진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누트 샤인 옆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랬지!”

누트 샤인은 에바에게 소리쳤다. 클로비스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알아차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리온은 곧 행동을 취했다. 검을 바짝 들고서 에바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며 가리온이 외쳤다.

“에바! 옆으로 비켜요!”

“어딜!”

에바가 옆으로 몸을 숙이려 하자, 누트 샤인은 에바의 머리 채를 휘어잡았다.

“아앗!”

에바는 허리가 뒤로 꺾이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촉수를 곤두세운 누트 샤인이 제대로 형체를 드러내었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 둬. 여자가 다친다.”

“이 바기족 놈!”

“오오! 인카르의 질긴 기사 양반! 이제 이 아가씨를 지키나? 마법사 아가씨는 어쨌지? 동굴에서 혼자만 살아남은 건가? 크크. 이를 어쩌나. 놀아날 아가씨를 자주 바꾸는 건 기사로서 아주 염병할 짓인데.”

“뭐라고!”

누트 샤인은 에바의 머리카락을 잡고 뱀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크크. 진정하고. 이 계집의 목숨을 구하고 싶거든. 당장 내 것을 내놓아라.”

“여기에 네놈 따위가 가질 것은 없다!”

가리온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검을 겨누자 클로비스가 막으며 말했다.

“아마도 고서를 이야기하는가 보네.”

“오! 자네는 얘기가 좀 통하겠구만. 저 기사 놈은 예의 나부랭이를 팔아먹었는지 늙은이 말을 전혀 듣질 않는단 말씀이야. 크크크”

누트 샤인은 비웃음을 흘리며 클로비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클로비스도 누트 샤인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 섰다. 하지만 클로비스의 눈빛은 적의에 가득 찬 눈빛이 아니라 안타까움이 섞인 묘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클로비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여자를 놓아 주십시오.”

“클로비스!”

“흥,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고서를 먼저 돌려주게!”

클로비스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뭐라고?”

에바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누트 샤인의 손이 노기로 떨렸다.

“그 고서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을 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내 것이네! 자네 같은 하찮은 인간이 관여할 일이 아니야!”

누트 샤인의 목소리도 파르르 떨렸다.

“알로켄족의 예언서는 지금의 트리에스테에 매우 위험한 물건입니다.”

클로비스는 누트 샤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놓치지 않고 또박또박 말했다.

“네 녀석이 그걸 어떻게 알고!”

누트 샤인의 얼굴은 점점 납빛으로 변해갔다.

“에바를 풀어주십시오.”

클로비스의 진지한 목소리가 누트 샤인에게 팽팽한 긴장감을 일으키는 사이, 에바는 슬쩍 단검 쪽으로 손을 대었다.

‘여차 하는 순간에 이 단검으로 탈출하자!’

한편 가리온은 클로비스의 장중한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그런 클로비스의 모습은 정말로 에바의 아버지처럼 보였다. 때문에 가리온은 더 이상 검을 앞세우며 달려들지 않고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 놈......!”

누트 샤인은 확실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 책이 알로켄족의 예언서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알로켄족과 관련이 있다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당황한 누트 샤인은 쉽게 말문을 열 수 없었다.

“네, 네 놈은 대체 누구냐!”

누트 샤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날카롭게 말하자, 클로비스는 앞으로 한 발 더 나서며 대답했다.

“저는 데비나님을 모시는, 클로비스 샤인입니다.”

“클로비스 샤인?”

누트 샤인의 눈은 얼굴의 반을 덮을 정도로 커다래졌고, 클로비스의 눈은 반대로 예리한 것을 찾아내려는 듯 작게 줄어들었다.

“샤인이라고?”

그 사이에 클로비스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가, 가까이 오지 마!”

누트 샤인은 에바의 머리채를 당기며 외쳤다. 가리온의 눈에 그것은 꼭 몸부림을 치는 것처럼 보였다. 에바는 몰래 꺼낸 단검을 꾸욱 쥐었다. 클로비스는 전혀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더욱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에바를 놓아주십시오!”

“닥쳐! 거기서 멈춰라! 이 계집을 죽이겠어!”

“후회하실 겁니다!”

“이, 이 놈이! 죽여 버린다니까!”

극도로 당황한 누트 샤인은 촉수를 쓸 생각도 못하고, 감춰왔던 뾰족한 날을 되는 대로 클로비스에게 푹 찔러 버렸다.

“오지마!”

“으윽.”

“아!”

클로비스는 눈을 누트 샤인에게 고정시킨 채 무릎부터 쓰러져 갔고, 바로 눈앞에서 클로비스의 피를 본 에바는 새파랗게 질려서는 쓰러지는 클로비스를 받쳤다. 누트 샤인은 전에 없이 덜덜 떨며 쥐었던 날을 떨어뜨렸다.

“내, 내가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지!”

갑자기 쓰러지는 클로비스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가리온은 상황이 아주 좋지 않게 변한 것을 곧 알게 되었다. 클로비스가 당했다면 싸울 사람은 가리온 자신 밖에 없었다.

“이 잔인한 바기족 놈!”

가리온의 검이 눈 안에 들어오자, 누트 샤인은 몸을 굴려 황급히 문 쪽으로 달아났다.

“크, 클로비스…….”

당황한 에바는 심약한 목소리로 클로비스를 불렀다.

“아, 아! 피가! 어떡해!”

가리온은 클로비스를 돌아보고 에바에게 빠르게 말했다.

“그렇게 있지 말고, 뭐라도 가져다가 지혈부터 시작해요! 난 저 바기족을 추격할 테니!”

에바가 대답하기도 전에 가리온은 서둘러 복도를 나섰고, 에바는 주섬주섬 거리다가 하늘색 드레스를 부욱 찢어냈다.

“괘, 괜찮을 거야.”

방에서 나온 누트 샤인은 되는 대로 뛰어갔다. 가리온이 추격해 올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상한데, 저기 왜 저러고들 있지?”

“가만, 쓰러진 거 아냐?”

“뭐? 그러네!”

앞쪽에서 경비병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트 샤인이 들어올 때 죽인 보초들을 이제야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 바기족 놈아! 숨지 말고 나오너라!”

가리온의 목소리가 차가운 복도를 타고 왕왕 울렸다.

“뭐야, 무슨 소리지?”

“저 쪽에서 났어!”

“가보자!”

경비병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 왔다.

‘제길!’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누트 샤인은 마침 옆에 있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등지고 섰다. 누트 샤인의 눈앞에서 두꺼운 커튼이 찬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병사들의 신발 굽 소리가 등 뒤를 지나가자 누트 샤인은 조심스럽게 커튼이 쳐진 곳으로 향했다. 발코니에서 바닥까지의 거리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복도로 가는 것은 무리고, 이리로라도 나가야겠군.’

서둘러 끈을 대신할 것을 찾은 누트 샤인은 침대보와 커튼을 이용해 급하게 긴 줄을 꼬아내었다.

‘약간 모자랄까.’

두리번거리던 누트 샤인의 눈에 작은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탁자에는 적당히 드리워진 덮개가 씌워져 있었다.

‘그래, 저걸 써야겠어.’

누트 샤인이 탁자 옆으로 다가가는 순간 최고조에 이른 달빛이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푸르게 빛나는 탁자 위에 누트 샤인을 지탱시킨 보물, 알로켄족의 예언서가 보란 듯이 자태를 뽐내었다.

“오! 오!”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하던 누트 샤인은 가만히 고서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 때 갑자기 복도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군요. 여기쯤에 있어야 하는데! 혹시 방안으로 들어간 거 아닐까요?”

“빌어먹을 밧슈 놈의 자손!”

누트 샤인은 다시 냉정을 찾은 얼굴로 돌아와 신속히 고서와 덮개를 들었다. ‘클로비스 샤인’이라고 적힌 봉투는 탁자 아래로 떨어졌지만 누트 샤인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저 쪽 방에는 없는데!”

“이 쪽 방에도 없어!”

“그렇다면!”

가리온이 클로비스의 방문을 여는 순간 누트 샤인은 창가에 매달려 있었다.

“크크크. 어린 친구. 달빛도 아름다운 밤에 뛰어다니느라 수고가 많구만.”

“이 놈!”

“하지만 어쩌겠는가! 알로켄의 가호는 이 몸에게 내린 것을!”

가리온이 눈에 불을 켜며 달려들기도 전에 누트 샤인은 고서를 감춘 가슴을 툭툭 치며 줄을 타고 스르르 사라졌다.

“거기 서라!”

가리온의 뒤에서 뒤늦게 나타난 병사들이 서둘러 창가로 뛰어갔지만 누트 샤인의 몸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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