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 두 번째의 힘 - 8장. Secret Conversation. 밀담
| 20.12.23 12:00 | 조회수: 1,082


자덴 성의 작은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 개의 달이 진 지는 이미 오래였고, 머지 않아 해가 떠오를 것이었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시는군요.”

황금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과일을 따 먹던 아이리스 비노쉬는 실소했다.

“네디앙. 너 설마 시에나가 걱정되는 게냐?”

아이리스 비노쉬보다 한 참은 젊은 어린 궁수가 안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이리스 비노쉬의 축약판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닮았지만, 둘의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그 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어요.”

“이런. 이런. 나의 어린 딸아. 가까이 오려무나.”

네디앙은 아이리스 비노쉬가 누워있는 황금 의자의 발치에 살짝 앉았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네디앙의 짧고 굵은 자줏빛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네디앙. 너는 너무나 의심이 없고 맑구나. 그런 건 네오스를 다스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하지만. 시에나님은 정말로 안색이 좋지 않으셨어요.”

“하하. 네디앙. 넌 정말.”

아이리스 비노쉬는 네디앙의 검은 눈동자를 뚜렷이 보며 말했다.

“잘 들어라. 네디앙. 너는 전혀 시에나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그는 듀스 마블의 수제자야.”

아이리스 비노쉬의 표정이 씁쓸하게 바뀌었다.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경계해야 하지. 겉모습은 여리게 포장했을지 몰라도 그 속에는 여우가 들어 있을지 호랑이가 들어있을지 누구도 알 수 없어. 잘 새기거라. 딸아. 시에나는 절대로 약한 아이가 아니다. 먼 훗날 그 애가 너와 우리의 네오스를 위협할 수도 있어. 듀스 마블의 후계자로 그 애가 가장 유력하니까. 우리는 그 때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야 해. 우리가 자덴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지.”

“어머니!”

“정말로, 정말로 조심해야 한단다. 네디앙. 슈마트라 초이가 인카르에 잡힌 이상. 위험은 우리에게도 다가올 수 있어. 듀스 마블은 분명 기회를 노릴 거야.”

아이리스 비노쉬는 조심스럽게 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시미르 산맥을 지나 기사들의 땅이 있는 북쪽으로 쭉 달려 온 잔바크 그레이는 새벽에야 제노아에 도착했다. 헬리시타는 초가을이었지만, 산맥을 하나 넘는 제노아로 가는 길에는 벌써 가을이 다 지나고 있는지 길마다 붉고 구멍 난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제노아에서 나고 자란 잔바크 그레이는 헬리시타에 다녀 온 며칠 사이 고향의 공기가 새삼 그립게 느껴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편안하고 익숙한 흙 냄새가 가볍게 몰려왔다.

“어이, 거기 누구야?”

이끼가 거뭇거뭇하게 덮여 있는 제노아의 높은 성벽 어딘가 쯤에서 경비병 하나가 외쳤다. 잔바크 그레이에게는 매우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야! 잔바크!”

잔바크 그레이가 호탕하게 이름을 외치자 말도 주인을 따르려는 듯이 우렁차게 히이이힝 울었다. 헬리시타에서 떠나올 때 급하게 구한 갈색 말이었다.

“어! 잔바크잖아! 돌아온 거냐!”

“오, 말이 멋진데!”

위에서 새벽을 같이 지키던 다른 경비병이 휘파람을 울렸다. 물레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면서 제노아의 철문이 철커덩철커덩 서서히 올라갔다. 점점 넓어지는 틈 사이로 안개가 낀 도시 제노아가 들여다 보였다.

“야, 근데 혼자야? 대장간 주인은?”

“헬리시타에. 만나서 얘기하자. 할 얘기가 아주 많아.”

말을 마친 잔바크 그레이는 말을 달려 고향 땅을 밟았다. 아이언 테라클과 헤어져 헬리시타를 출발한 지 사흘 만이었다.

잔바크 그레이는 망토에 숨겨진 검을 감추며 조심스레 계단을 올랐다. 오래된 나무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울리자 유리잔을 닦던 주인은 고개를 빼 들어 잔바크 그레이를 멀끔히 쳐다보았다. 주인은 곧 유리잔을 조심스레 내려놓더니 주방으로 사라졌다.

잔바크 그레이는 복도를 걸어가는 와중에도 계속 발에 신경을 집중시켜야만 했다. 복도 역시 나무가 흔들리며 삐걱거렸기 때문에 큰소리를 내지 않도록 해야 했던 것이다.

복도 끝 제일 구석에 도착한 잔바크 그레이는 방문을 가만히 두드렸다. 아이언 테라클은 잔바크 그레이가 끝까지 신중에 신중을 기할 것과 눈에 띄게 행동하지 않을 것을 당부했던 터였다.

“접니다.”

곧, 문이 스르르 열렸다.

“얼른 들어오게.”

아이언 테라클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구석구석 살핀 후 서둘러 문을 닫고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드리웠다. 굵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잔바크 그레이는 소매 위에 고여버린 빗물을 툭툭 털어 내고는 망토를 벗어 의자 위에 걸쳐 놓았다. 망토에서는 여전히 빗물이 똑똑 떨어져 흘렀다.

“그래, 어떻든가?”

잔바크 그레이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말했다. 진지한 눈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청기사들과 이곳 헬리시타 주민들의 마찰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슈마트라 초이님은 곧 사죄의식에 처해질 것 같습니다. 아직 인카르 신전 지하 감방에 있습니다만 내일모레 하는 모양입니다.”

“역시.”

“헬리시타의 사람들은 슈마트라 초이님의 가족까지도 몰살시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슈마트라 초이의 가족이라.”

“거, 안에 계시오?”

아이언 테라클과 잔바크 그레이는 동시에 눈을 문가로 돌렸다.

“주인의 목소리야.”

아이언 테라클의 말에 잔바크 그레이는 문 옆에 세워 둔 검을 힐끗 보고는 문으로 걸어갔다.

“뭐요.”

“아니, 그냥 식사는 안 하시나 해서.”

주인은 능청스럽게 말하며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음. 그렇지 않아도 식사를 할 때가 되었군. 좋소. 이리로 가져다 주시오. 두 명이오.”

“예, 예. 그러지요.”

주인은 천천히 돌아서더니 삐걱거리는 복도를 빠르게 걸어갔다.

아이언 테라클은 잔바크 그레이가 다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듀스 마블은 사람들의 요구에 호응할 걸세. 슈마트라 초이는 궁사계와 정략 결혼을 한 자야. 이번 기회를 이용해 궁사계에게도 본보기를 보여주려 하겠지. 그리고, 그의 아들은.”

“얼마 전에 청기사단에 입단 해 노라크 동굴로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흥, 듀스 마블은 그 아들마저도 제거해 버리려고 할 것이야. 그는 후환을 두려워하지.”

“그런데 이번 원정의 청기사 대부분이 아레스 숲에서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 법이지. 쯧. 젊은 나이에 안 됐군. 부모도 다 죽게 생겼는데.”

“식사 왔습니다.”

“벌써?”

잔바크 그레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빨리도 왔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순간 아이언 테라클의 눈이 번쩍했다.

“그 문 열지 말게!”

“예?”

하지만 잔바크 그레이는 이미 문 고리를 밀어낸 후였다.

“이 기사 놈!”

장정 여러 명이 문 앞에서 도끼와 낫으로 잔바크 그레이를 내려찍으려 하고 있었다.

“헛!”

순식간에 잔바크 그레이가 있던 자리에 큼직한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저 자야! 저 자가 아이언 테라클이야!”

여관 주인은 아이언 테라클을 가리켰다. 창가에 놓여 있던 거울을 통해 아이언 테라클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퉷, 저 놈이 기사들 우두머리란 말이지! 너 이놈 잘 걸렸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헬리시타 사람을 죽인 기사 놈들아! 너희들 오늘 한 번 뒈져봐라!”

잔바크 그레이는 서둘러 검을 집으려 했지만, 장정 하나가 퍼런 날을 들고 막아 섰다.

“어딜!”

“이 쥐새끼 같은 놈들!”

다시 한 번 도끼 날이 사정없이 날아 오려 하자 잔바크 그레이는 급한 대로 의자로 막아 섰다. 작은 의자는 곧 산산조각 나버렸고 창가로 몰린 아이언 테라클은 거울을 집어 던졌다.

“뭐야!”

“으악!”

도끼에 찍힌 거울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면서 앞에 있던 장정들의 얼굴과 눈에 박혔다.

잔바크 그레이는 당황한 장정들에게 다가가 주먹을 날렸다. 퍽 소리와 함께, 목뼈가 돌아간 장정이 쓰러졌다. 여관 주인은 기겁해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 이 놈들이!”

장정들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마구잡이로 도끼와 낫을 휘둘렀다. 잔바크 그레이가 검으로 눈을 돌리자 아이언 테라클이 잡아 끌었다.

“지금은 상황이 아니네!”

“하지만!”

“어서 나와!”

얼어버린 주인과 오늘 부로 눈을 잃을 장정들을 두고 여관을 빠져 나온 아이언 테라클과 잔바크 그레이는 서둘러 마구간으로 향했다. 아이언 테라클은 안장을 챙기며 말했다.

“제노아로 가게.”

잔바크 그레이는 놀라서 두 눈을 부릅떴다.

“잔바크. 중요한 일이네.”

“꺄아!”

“으앗!”

멀리서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장정 하나가 창문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기사 놈들의 짓이다!”

“잡아라!”

아이언 테라클의 쭈그러진 얼굴에 묻힌 눈동자가 첨예하게 빛났다. 잔바크 그레이도 그 눈빛에 숨 죽이는 것 같았다.

“자네는 제노아로 가서 기사들을 모으게.”

“기사들이요?”

“그래. 군대를 만들게. 우리는 그 군대로 여기 헬리시타를 정복할 거야!”

아이언 테라클의 말에 너무도 놀란 잔바크 그레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디냐! 나와라! 이 기사 놈들아!”

아이언 테라클은 말을 서둘렀다.

“듀스 마블이 사죄의식을 치르기 전까지 여기 헬리시타에 병사들을 데리고 오게. 이 곳에는 엄살 떠는 마법사들뿐이니, 듀스 마블만 제거하면 헬리시타는 내 손에 넘어오게 될 것이야.”

“그, 그럼 검성은. 그럼 슈마트라 초이님도 구할 수 있는 겁니까?”

아이언 테라클은 재빨리 말에 올라 타며 말했다.

“그건 좀 서둘러야 할 거야. 듀스 마블은 성미가 급하지.”

“저기 마구간이다!”

“잡아라!”

“잔바크. 잘 들어라. 칠 일을 주겠어. 칠일 후, 헬리시타 북문 앞에서 만나자!”

말을 마친 아이언 테라클은 서둘러 마구간을 빠져 나갔다. 잠시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잔바크 그레이도 재빨리 말에 올라탔다.

“저 놈이야! 잡아라!”

“이 기사 놈!”

잔바크 그레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속력으로 제노아를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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