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스 마블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막막한 마음을 달리 표출해 낼 길이 없었다. 아까 자신이 그렇게 윽박을 질렀으면 비나엘르 파라이는 이미 인카르 신전을 떠났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혹까지 붙여서 듀스 마블 앞에 나타났다. 듀스 마블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예의를 차려서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입술 한쪽이 들썩거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제가 꼭 대표로 가야 한다, 이겁니까?”
아이리스 비노쉬는 한 손으로 비나엘르 파라이의 팔을 지그시 잡으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우리는 듀스 마블님이 적임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듀스 마블은 울컥하는 감정이 한번 더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을 애써 억누르려고 하는 사이에 비나엘르 파라이가 입을 열었다. 평소 지나칠 정도로 느긋한 비나엘르 파라이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어딘가 조급하고 안정되지 않은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도, 네가 적임자 같구나.”
“역시 그렇죠? 그 위대하다는 인카르의 듀스 마블인데, 다른 누가 있겠나요? 당연히 가셔야죠.”
평소 비나엘르 파라이의 뒤에 숨어 권력만 잘근잘근 씹어 오던 듀스 마블을 아니꼽게 생각했던 아이리스 비노쉬의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듀스 마블은 화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삼키며 한 번만 더 참기로 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듀스 마블은 우선 비나엘르 파라이부터 잡기로 했다.
“지난 번에 말씀 드렸듯이, 지금 헬리시타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인카르의 중역들이 살해당한 상황에서, 청기사단을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것이고,”
“살해를 당해요?”
듀스 마블의 말을 자르고 아이리스 비노쉬가 끼어들었다.
헬리시타 성벽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살인 사건을 아이리스 비노쉬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듀스 마블은 아이리스 비노쉬에게는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지금 제가 자덴으로 가는 건.”
“살인 사건인가요?”
아이리스 비노쉬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청기사들을 운운하는 것이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것 같았다. 듀스 마블은 더러운 것을 보는 것 마냥 눈을 아래로 깔더니 다시 비나엘르 파라이를 향했다.
“제가 자덴으로 가는 것은 그리 좋은 결정이 아닌 듯 싶습니다.”
“도대체 헬리시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아이리스 비노쉬는 소리를 더 높여 물었다. 만약 인카르에 대한 모반이 일어난 것이라면 아이리스 비노쉬는 당장 자덴에서 철수할 작정이었다. 기울어가는 인카르를 위해 궁사족이 피를 흘릴 필요는 없었다. 궁사족에게는 풍요로운 네오스로도 충분했다.
듀스 마블은 드디어 한 마디 툭 던졌다.
“흐흠, 이번에 청기사 단장이었던 슈마트라 초이가, 다이몽 루세와 티몬 겐조을 살해했습니다.”
“그럴 리가!”
“다이몽 루세는 곧 제노아로 파견될 예정인 미래가 전도유망한 헬리시타의 명문가 청년이고, 티몬 겐조는 아시다시피 조디악 회의에도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저명한 서기관이었지요.”
듀스 마블은 다시 고개를 비나엘르 파라이에게로 돌려 말을 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님, 보십시오. 이건 결코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제노아에서는 진작부터 우리 헬리시타를, 인카르를 넘보고 있었습니다. 그 여파로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쉽게 넘기면 안됩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안색이 새파래진 아이리스 비노쉬는 고개를 저었다. 순간 듀스 마블의 작은 눈이 섬뜩하게 번쩍였다. 듀스 마블의 머리 속에 기막힌 인연의 실타래가 풀어졌다.
“아! 아! 이런, 이런. 쯧쯧.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하얗게 질려있던 듀스 마블의 얼굴은 어느 새 화색이 도는 듯 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천천히 듀스 마블을 바라보았다.
“허허. 이거, 우연히도 디에네 비노쉬의 부군(夫君)이 살인마 슈마트라 초이군요!”
아이리스 비노쉬는 듀스 마블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을 리가.”
“아이리스 비노쉬님. 허허. 저도 무척이나 안타깝지만, 이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현장을 목격한 사람만 삼십 명이 족히 넘지요.”
“말도 안돼.”
듀스 마블은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게다가.”
듀스 마블의 입가에는 얇은 미소마저 번져갔다.
“원래, 이런 성질의 일은 혼자서 계획해 실행하기가 힘든 법이죠.”
듀스 마블의 말은 분명했다. 궁사계도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침이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듀스 마블과 비나엘르 파라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지금 그 말씀은! 아뇨, 말도 안됩니다. 설령 디에네가 그 계획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는 그런 일에 함부로 동참할 만큼 어리석은 아이가 아닙니다!”
듀스 마블은 한쪽 눈을 치켜 뜨며 여유를 부렸다.
“글쎄요. 뭐, 저도 그렇게는 생각하려 합니다만,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허허.”
그러자 비나엘르 파라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전히 조급한 듯 했지만 따로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무언가 사정이 있을 거야. 그래도 한 때는 검성이었던, 노라크 교도들을 정벌했던 청기사잖아.”
“아! 비나엘르 파라이님!”
아이리스 비노쉬는 감격했다는 듯이, 정겹게 비나엘르 파라이를 불렀고, 듀스 마블은 자신이 아닌 아이리스 비노쉬를 감싸는 듯한 비나엘르 파라이가 야속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듀스 마블도 이판사판이었다.
“정말 너무 하시는군요.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그 자는 여기, 헬리시타의 인카르에서, 많은 사람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그 가운데서 살인을 했단 말입니다!”
듀스 마블의 그 말에 비나엘르 파라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만나 본 슈마트라 초이는 기사로서의 위엄을 가지고 있는 위인으로 살인 따위를 할 만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살인을 한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이계의 오염으로 트리에스테 각지에서 오염체가 들끓고 있는 상황에 살인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다이몽 루세나 티몬 겐조는 아무 죄도 없는 헬리시타의, 인카르의 사람이었다. 그것은 절대 묵과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상황이 절대적으로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낀 아이리스 비노쉬는 손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것은 노기와 분노가 한데 섞인 것이었다. 인카르와의 협정으로 자덴을 맡은 궁사들은 아무 이유 없이 바기족의 침략을 받아 날마다 고통스럽게 보내고 있는데, 지금 인카르 깊은 곳에서는 제노아를 비롯, 네오스까지도 집어 삼키려는 듀스 마블의 야심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지금까지 비나엘르 파라이를 믿으며 평화를 지키려 했던 모든 노력들이 헛된 물거품처럼 느껴졌다. 애초에 슈마트라 초이와 디에네 비노쉬의 계약 결혼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얽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어정쩡한 태도에 잔뜩 심기가 불편해진 듀스 마블도 작은 눈을 날카롭게 내쏘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있어.’
듀스 마블은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카르의 사람을 둘이나 죽인 살인범을 그렇게 두둔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슈마트라 초이가 궁사계에 관련된 사람이라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궁사족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더냐!’
듀스 마블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궁사계도 크게 혼쭐을 내리라고 다짐했다.
세 사람을 둘러 싼 공기가 차갑게 돌자, 다른 생각에만 열중한 것 같았던 비나엘르 파라이가 마침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듀스, 내가 돌아 올 때까지 아무 짓도 하지 말아라.”
“네?”
“이번 일은 궁사계에서도 그렇고, 나에게도 좀 그렇고. 어쨌든 그 사건은 내가 직접 처리하겠어.”
“비나엘르 파라이님!”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듀스 마블을 앞서, 아이리스 비노쉬가 먼저 입을 떼었다.
“아이리스. 걱정 말아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듀스 마블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저 기막힌 두 암캐가 듀스 마블의 계획을 망가뜨리려고 하고 있었다.
“도대체 비나엘르 파라이님은!”
“됐어. 이제 그만하자.”
비나엘르 파라이는 듀스 마블의 말을 엄격하게 잘라내었다.
“듀스. 곧 자덴으로 출발하거라. 바기족 이주 건은 매우 중요한 일이야. 그건 나보다도 네가 더 잘 알겠지?”
비나엘르 파라이는 우선 아이리스 비노쉬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자신의 일도 처리한 후에 슈마트라 초이의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아이리스. 그럼 우린 그만 일어날까요?”
입이 막혀버린 듀스 마블을 뒤로 두고, 비나엘르 파라이는 아이리스 비노쉬와 일어섰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더 이상은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지켜보마.”
뒤돌아서는 비나엘르 파라이를 향해, 듀스 마블의 눈빛이 독하게 빛났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아이리스 비노쉬와 함께 듀스 마블의 집무실을 나서자 듀스 마블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치겠군. 그렇게 믿었는데 말이야. 같은 마법사로서 인카르를, 여기 헬리시타를 트리에스테 대륙 제일로 키울 것으로, 지금 이 권력을 영구히 유지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이렇게 그냥 이대로 질질 끌려갈 것인가? 이렇게 흐물흐물 무너져 버리는 건가? 이렇게?”
쾅-.
책상을 내리치는 듀스 마블의 주먹에 퍼런 핏줄이 드세게 섰다.
“도대체가! 이젠 정말 더 봐줄 수가 없어!”
요쉬마는 벌컥 문을 열어 젖혔다. 듀스 마블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자기들을 물로 봐도 너무 흐리게 봤다. 평생 책만 파고든 고지식한 학자일지라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감은 잡을 수 있었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던 요쉬마는 모든 것이 남들보다 느렸다. 그런 요쉬마는 강해지고 싶었다. 타고난 자신을 넘어 강해지고 싶었다. 그는 점점 흑마법에 빠져들었다. 병약한 만큼 더 큰 부작용을 입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쉬마는 연구하고 또 연구했다. 연구가 깊어질수록 요쉬마의 몰골은 더욱 수척해졌다. 그 즈음 만난 것이 헤이치였다.
헤이치는 요쉬마와 비슷한 연배의 청년이었지만, 헬리시타의 소문난 명의이기도 했다. 요쉬마와 헤이치는 그렇게 만나게 되었고, 헤이치는 요쉬마의 살아가려 하는 강한 의지에 감동을 받아 기꺼이 연구에 동참하였다. 헤이치는 소환술 보다는 주로 조련술에 관심을 두었다. 의사라는 신분 때문에 특히 그런 연구에 어울린 것도 있었지만, 요쉬마의 소환술 연구는 워낙 깊이가 있던 터라 헤이치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날이 갈수록 요쉬마는 점점 더 조급해졌다. 헤이치의 건강한 모습은 쭈그러진 몸을 가진 요쉬마를 더 재촉하는 듯 했다. 요쉬마는 강한 육체를 받아들여 건강해지고 싶었지만, 후원자인 듀스 마블은 괴수들을 소환하는 것에만 만족해 했다. 처음에 그럴싸하게 이야기했던 흑마법의 합법화 이야기도 좀처럼 다시 나오지 않았다. 흑마법이 합법화만 된다면 보다 빨리 연구를 끝마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요쉬마의 바람은 거품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는 연구 지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요쉬마는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 날을 떠올리며 듀스 마블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여기가 어디라고! 지금!”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잔뜩 상해 있었던 듀스 마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요쉬마를 노려 보았다. 두껍게 내려 앉은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기다리라 해서 기다렸습니다. 참으라 해서 참았습니다. 저희의 연구 성과에 대한 대가가 고작 이겁니까?”
요쉬마의 박력에 놀라 버린 헤이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우뚝 서 있었다.
“이젠 쓸모가 없어졌습니까? 저희가 그냥 당하고만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지금 아주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는가?”
헤이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듀스 마블과 요쉬마는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지금까지 해 온 연구들은 그 나름대로 성과를 보였고, 또 흑마법의 부작용도 날로 줄여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요쉬마는 듀스 마블을 뛰어넘을 듯이 노려보았다.
“이제는 그 연구마저 방해하시는 겁니까!”
“뭐라고?”
“왜 더 이상 실험체들이 도착하지 않는 겁니까!”
“이! 바기족!”
듀스 마블은 요쉬마가 이렇게 달려드는 이유를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자덴과 공성중인 바기족이 실험체를 보내지 않은 것이었다. 듀스 마블은 콱 책상을 내려 찍었다.
‘그렇지 않아도 슈마트라 초이에게 집중하기도 힘든 판에 이젠 바기족들까지 난리라니!’
듀스 마블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트리에스테 대륙의 관심이 공성전이 벌어진 자덴에 쏠리었기 때문에 슈마트라 초이를 간단히 제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듀스 마블이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슈마트라 초이의 인간성을 믿는 사람도 많았거니와 특히 비나엘르 파라이가 주저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게다가 하찮은 바기족 따위가 덩달아 말썽을 부리는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요쉬마는 불거진 눈을 부라리며 대들었다. 듀스 마블이 조금씩 물러서는 듯 하자, 헤이치도 요쉬마처럼 어깨를 피고 듀스 마블을 바로 보았다.
“이런 멍청한 바기족 놈들! 온 사방에서 말썽뿐이로군!”
듀스 마블은 상황이 자신을 자덴으로 몰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이대로 헬리시타를 떠날 수는 없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슈마트라 초이를 맡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되면 듀스 마블의 계획이 한 순간에 틀어질 수도 있었다. 듀스 마블은 비나엘르 파라이가 헬리시타에 돌아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 함을 다시 상기시켰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덴과 바기족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 때는, 이럴 때는, 그래! 그렇지! 시에나!”
듀스 마블은 노라크 동굴로 출발한 뒤 여태 소식이 없는 시에나를 떠올렸다. 곧 듀스 마블은 공중에 그리폰의 허상을 띄웠다. 요쉬마와 헤이치는 잠시 소리를 죽이고 허상에 집중했다. 그리폰은 노라크 동굴 위를 계속 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었다. 듀스 마블이 팔을 다시 안으로 휘 거두어 들이자 허상은 사라졌다. 넋을 잃고 공중을 바라보던 요쉬마와 헤이치는 놀란 눈을 듀스 마블에게로 돌렸다. 듀스 마블은 숨을 여러 번 골라 쉬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것 같더니 마침내 결정을 내린 듯 평소의 비열한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약속을 지키는 편이지.”
고문관이 열쇠를 돌리고 철문을 당기자 끼익 하고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오늘은 웬일로 듀스 마블님까지 행차를 하시고,”
고문관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듀스 마블을 바라보았다.
“문단속이나 잘하게.”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문관은 듀스 마블이 던져주는 금화를 넙죽 받으며 실실거렸다. 고문관이 열쇠를 덜렁거리며 사라지자 헤이치가 듀스 마블에게 말했다.
“듀스 마블님. 무리입니다. 인간을 소환시킨다니요!”
“이계의 생물도 소환시키는 마당에 인간은 못할게 또 뭔가.”
듀스 마블은 조용히 대답했다. 작은 목소리가 뱅뱅 울려 퍼졌다.
“저희가 불러내는 생물은 이계와 현재의 영역만 넘어선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현재에서 현재로 불러오는 겁니다. 모든 인간에게 시간은 일정한 법인데, 도대체 어떻게 현재에서 현재를 끌어온다는 겁니까!”
듀스 마블은 헤이치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또 시에나 자체도 그렇습니다! 시에나 정도의 마법사는 인격체의 크기가 실험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부작용이 한계 수위를 넘을 수도 있습니다. 이건 너무 위험하다구요!”
“이미 얘기는 끝나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그만하시오. 이 이상 말을 꺼냈다가는 가만있지 않겠소.”
헤이치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던 요쉬마는 그제서야 빈정거리며 입을 열었다.
“듀스 마블님이야말로 약속을 꼭 지키시기 바랍니다. 저희들도 결코 그냥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가파른 돌계단 맨 밑에는 듀스 마블이 요쉬마와 헤이치에게 마련해 준 연구실이 있었다. 바늘만한 빛도 전혀 들지 않는 이 어둑어둑한 곳에는 벽마다 높은 책장이 끝을 모르고 세워져 있었고, 구석진 모서리에는 철로 만든 우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우리는 어느 정도 녹이 슬어 그런 것인지, 실험체의 피가 고여 그런 것인지 거뭇거뭇한 부분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우리 옆에는 마대 자루 같은 것이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몇몇 포대는 구멍이 난 곳으로 썩어가는 뼈가 삐죽이 나와있기도 했다.
검은 흙을 단단하게 지져 대충 평평한 돌을 채운 바닥은 습기로 인한 냉기와 약병들이 한데 어우러져 뒹굴고 있었다. 듀스 마블은 비단 신발로 밟을 만한 곳을 골라 중앙으로 걸어갔다. 습기로 축축해진 중앙의 나무 의자가 그나마 앉을 만해 보였다. 다른 의자는 서너 개씩 쌓여 있거나,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듀스 마블이 역겨운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고 있는 사이 요쉬마는 우리에 가까운 긴 탁자로 걸어 가 자기 팔 너비만큼이나 되는 큰 책을 뒤적거렸다.
헤이치도 요쉬마를 따라가 책을 뒤적이는 척 하며 작게 말했다.
“요쉬마, 이건 아니네. 자네도 알지 않은가. 너무 위험하다구.”
요쉬마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아니, 내겐 기회야. 어차피, 오염체를 가지고는 내 연구를 완성할 수 없어. 이번에 시에나를 꼭 소환해내서, 내 연구도 완성시키고. 더불어 소환술도 확실한 정식 마법으로 등록시키겠어.”
“요쉬마. 하지만.”
“우리는 이미 계약했어.”
요쉬마는 듀스 마블을 힐끗 보고는 다시 책을 뒤적거렸다.
“이번엔 반드시 성공시킬 거라네.”
듀스 마블은 요쉬마와 헤이치에게 소환술로 시에나를 대령시킬 것을 요구했고, 이번 일만 잘 처리한다면 지체 없이 소환술을 합법화시키겠노라고 약속했다. 부작용으로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요쉬마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듀스 마블의 요구를 받아 들였다. 무언가 큰 일이 생기고 말 것 같은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던 헤이치는 요쉬마를 여러 번 말렸지만, 야릇하게 빛나는 요쉬마는 불길 속에 빠져들어 죽고 마는 하루살이처럼 책을 파고 들었다.
요쉬마는 곧 탁자 위에 펼쳐진 커다란 책들과 약병들을 대강 치우고, 두루마리 하나를 펼쳤다. 그 위에 지금까지 요쉬마가 혼신을 다해 연구했던 핵심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두 손을 탁탁 털어 두꺼운 질감의 옷에 쓰윽 문지른 요쉬마는 어두워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곳으로 가서 천을 벗겨 냈다. 투명하게 크리스탈 원통이 푸름하게 빛을 띠었다.
요쉬마가 선으로 이어진 기계를 마구 돌리자 크리스탈은 차츰 황색 빛을 띠기 시작했다.
“오!”
듀스 마블의 감탄에 아랑곳하지 않고, 크리스탈을 향해 선 요쉬마가 주문을 시작했다. 약간 흥분한 듯한 요쉬마의 얼굴은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홍조를 띠고 있었고 헤이치는 여전히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룬 배니쉬 비 가스가이아 보이드 디스팽 요쉬마 스핀 시에나.”
“요쉬마?”
“자기 그림자에 주문을 걸었군.”
듀스 마블의 말과 동시에 헤이치는 눈 앞이 아찔해졌다.
지금까지 요쉬마와 헤이치는 소환술에 그림자를 이용해왔다. 또 하나의 정신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림자를 이용해 일차적인 부작용을 줄였던 요쉬마는 다음으로 가축 등의 동물을 이용했다. 술사에게 가해지는 부작용은 좀 더 줄일 수 있었지만 인격체가 훨씬 떨어지는 동물들은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그런 면에서 바기족의 실험체들은 훨씬 유용했다. 체력적인 면으로나, 인격체의 크기로나 금방 죽어버리는 동물보다 월등한 조건을 가지고 있던 실험체들은 훌륭한 매개체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마땅한 실험체도 없는 상황에서 요쉬마는 시에나를 구하기 위해, 위험천만하게도 자신의 그림자에 직접 주문을 걸어 버린 것이었다. 그만큼 소환술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쉬마의 주문이 시작되자, 그림자에 차차 붉은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사악해 보이기 짝이 없는 붉은 빛이 슬슬 기어올라오면서 요쉬마의 그림자는 동그랗게 변했다. 시에나를 데려 올 차원의 통로로 변형한 것이었다.
요쉬마는 자신의 정신이 꾸역꾸역 이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가뿐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요쉬마는 이를 악 물고 견뎌내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평생을 바친 연구를 끝마치기 위해서라도 요쉬마는 남은 정신력을 끌어 모아 주문을 이어야 했다. 황색 빛을 뿜은 크리스탈을 앞에 두고도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요쉬마의 얼굴 사이로 땀이 비질하게 흘러내렸고, 요쉬마는 마침내 주문을 완성해냈다.
“룬 배니쉬 도 라 텔레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