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마트라 초이가 인카르의 저명인사를 살해하고 신전의 지하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는 헬리시타에 삽시간에 퍼졌다. 헬리시타의 사람들은 청기사의 배반을 운운하며 기사들을 멀리하거나 돌맹이를 집어 던졌다. 맹세의 검 아래 헬리시타의 인카르를 수호하던 기사들의 표정은 차차 노여움으로 변해갔고 헬리시타 곳곳에서는 기사들과 주민들의 팽팽한 긴장감이 나돌았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슈마트라 초이를 만나기 위해서 어둡고 습한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애초에 비나엘르 파라이가 슈마트라 초이를 만나려 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듀스 마블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친아들처럼 아끼는 듀스 마블이었지만, 슈마트라 초이는 디에네 비노쉬와 정략 결혼을 한 자였다. 냉철한 아이리스 비노쉬, 즉 궁사계가 관련되어 있는 이상 듀스 마블이 멋대로 하도록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과거를 잊지 않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무섭게 똑똑하면서도 냉정한 여인이었다. 때문에 비나엘르 파라이는 자신을 이을지도 모르는 듀스 마블보다는 자신이 칼자루를 쥐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다른 이유, 그것은 듀스 마블과 헬리시타에 관련한 일이라기 보다는, 비나엘르 파라이 자신의 과거와 더욱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오래 전 트리에스테의 대재앙 그랜드 폴 당시, 비나엘르 파라이는 사랑하는 남자와 아들을 동시에 잃었다. 사랑했던 그는 이계의 수문장 카론과 싸웠고, 비나엘르 파라이는 아들을 성스러운 힘이 깃들어 있는 파르카 신전에 안전하게 두고 방주 아르카나를 봉인하기 위해 파르카 신전을 떠났었다. 하지만 비나엘르 파라이는 수 년 동안 신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처음부터 파르카 신전에 돌아가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봉인만 하려 했고 인간사에 관여할 마음은 티끌만치도 없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힘은 그녀가 파르카 신전으로 곧바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했다. 이계의 수문장 카론의 힘은 알로켄인 비나엘르 파라이마저도 꼼짝 못할 위력을 가진 것이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계의 흔적은 거의 지워졌고 방주 아르카나는 대륙을 향해 열렸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서둘러 파르카 신전으로 달려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었지만 이미 그곳에는 생명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이 땅에 남은 이유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비나엘르 파라이는 실낱 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미친 듯이 트리에스테 대륙을 뒤졌다. 그렇지만 어떠한 실마리도 잡히지 않았고, 비나엘르 파라이에게는 포기라는 그늘을 인정해야만 하는 아픔이 쥐어졌다. 그 후 그녀는 인카르에서 부모가 없는, 마법에 가장 유능한 아이를 골라 내어 아들처럼 키웠다. 무엇이든 그 누구든 비나엘르 파라이에게는 살아갈 버팀목이 필요했고, 그렇게 이어진 인연이 바로 듀스 마블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비나엘르 파라이는 이상하고도 따뜻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이 바라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던 비나엘르 파라이에게 남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난 것은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슈마트라 초이를 본 후였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슈마트라 초이를 본 것은 슈마트라 초이가 노라크 교도들을 물리치고 인카르에서 청기사단장으로서 훈장을 받던 날이었다. 그 때의 그 기분을 비나엘르 파라이는 그 당시에는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무언가 밝혀야만 할 것 같은 본능이 비나엘르 파라이를 깨웠다. 그냥 이대로 지나쳐서는 안될 것 같은 예감, 버리면 후회할 것만 같은 미련스러운 마음이 비나엘르 파라이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슈마트라 초이의 얼굴은 고문을 받은 그날부터 점점 골이 파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살점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수척해져 버렸다. 곱게 자란 비나엘르 파라이가 그런 흉측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은 물론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아!”
비나엘르 파라이가 슈마트라 초이를 보고 제일 먼저 꺼낸 말은 탄식이 섞인 한숨 소리였다.
슈마트라 초이는 정신을 잃은 듯, 비나엘르 파라이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고, 고문관이 땀이 얼룩진 발간 얼굴을 조아리며 비나엘르 파라이를 맞았다.
“이,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시다니.”
비나엘르 파라이는 슈마트라 초이의 실핏줄이 터져 뒤엉킨 얼굴이 너무도 괴상망측해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탁자를 바라보던 비나엘르 파라이의 얼굴은 바로 하얗게 질려버렸다. 붉은 피가 아롱져있는, 고문에 쓴 것이 틀림없는 기구들이 정렬로 뉘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흐. 제가 좀 솜씨를 부려봤습니다. 이래뵈도 이 방면에선 저를 따라올 자가 없습죠. 자. 자. 여기 앉으십시오.”
고문관은 실실거리며 비나엘르 파라이를 나무 의자에 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비나엘르 파라이는 얼룩진 피들이 엉겨 있는 것이 훤히 보이는 의자에는 도저히 앉고 싶지 않았다.
“아니. 됐네.”
“아. 예. 예.”
고문관은 실망스런 표정을 감추며 앵무새 마냥 굽실거렸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고문관은 개의치 않고 슈마트라 초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들을 수 있는가.”
슈마트라 초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고문관이 옆에 있던 채찍을 들어 내리쳤다.
“이 놈아! 비나엘르 파라이님이 물으시는데 대꾸를 안 해!”
“으으…….”
슈마트라 초이의 몸이 양 팔과 양 다리가 얽혀 있는 쇠사슬에 흔들렸다. “그만하게.”
“아, 예. 예”
비나엘르 파라이가 무겁게 말하자 고문관은 얼른 채찍을 뒤로 거두며 얼굴을 바짝 숙여 굽신거렸다.
“나를 아는가.”
비나엘르 파라이는 사파이어가 박힌 하얀 오클라스의 밑단을 가볍게 잡아들며 슈마트라 초이에게 조금 더 다가섰다.
“누…… 누구…….”
“나는 비나엘르 파라이다.”
“비…… 나…… 에……? 엘………?”
“엘? 그래. 나는 엘이지.”
비나엘르 파라이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 같았다.
‘무언가, 내가 기다리던 무언가가!’
비나엘르 파라이는 고문관에게 자리를 비키라는 눈짓을 보냈다. 고문관은 얼른 사라지는 듯 하더니 벽 모서리에 숨어서는 작은 귀를 쫑긋 세웠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 슈마트라 초이를 만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전에 가졌던 느낌이 더욱 확실해져 오는 것 같았다.
“그가 정녕 나의 아들일까?”
비나엘르 파라이는 지금껏 친아들을 찾으며 살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당연히 마법사일 것이라 생각했고, 듀스 마블의 역량에 감탄하면서 그를 아들같이 대해왔다.
그것이 슈마트라 초이를 만나면서부터 조금씩 미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칼리지오 밧슈를 떠올리게 하는 고독하고도 싸늘해 보이는 눈동자는 비나엘르 파라이의 불안정한 감정에 확신을 주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슈마트라 초이를 만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슈마트라 초이는 그 사람을 기억나게 했다.
“파라이님은 저 남자애를 어디서 데려 온 거야?”
“밧슈씨의 아들이래요.”
“세상에! 그러면 인간의 피가 섞인 아이 아냐?”
“그러니까 말이에요.”
엘이 ‘인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어른들의 말씀에 엘은 ‘인간’이라는 것이 큰 전염병을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칼을 처음 봤을 때 엘은 그가 ‘인간’이 아닐 거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안녕.”
칼이 엘을 향하여 방긋 웃을 때 엘은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알로켄과 무엇이 다르다는 거지?’
엘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자, 칼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졌다. 아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너도 다른 어른들하고 똑같구나.”
“응?”
“인간은 전염병이나 일으키는 괴물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엘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응. 그런 줄 알았어. 그렇게 들어왔거든.”
짙은 남색 눈이 반짝거리는 칼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치만, 넌 괴물이 아니야.”
칼의 창백한 뺨이 발그레해졌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넌 아빠랑 가장 친한 분의 아들이라서 잠시 이곳에 있을 거라고. 그 동안은 내 동생이라고.”
엘은 천진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난, 비나엘르 파라이야. 그냥 엘이라고 불러. 넌?”
“칼리지오 밧슈.”
“칼리지오?”
칼은 그 진한 남빛 눈으로 엘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칼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칼! 오늘부터 넌 내 동생을 하는 거야!”
비나엘르 파라이는 하녀를 시켜 차를 가져오도록 했다. 하이하프 설원에서나 볼 수 있는 헬리시타에서는 구하기 힘든 차였다. 그 차의 맛이 너무나 써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별로 마시지 않았지만, 비나엘르 파라이는 이상하게도 그 차를 마시면 너무나 편안해졌다. 항상 마음을 졸이며 살다가도 그 차 맛만 보면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이 그림처럼 흘러갔다.
차를 홀짝이던 비나엘르 파라이는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헬리시타의 밤, 이곳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마치 어린 날처럼.
“이리와.”
엘은 칼의 손을 잡아 끌었다.
“괜찮다니까. 이리와 봐.”
“엘.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칼의 낮은 목소리가 멋지게 울렸다.
잠시 동안만 엘의 집에 있을 거라던 칼은 변성기가 지나서도 여전히 엘과 함께였다.
“칼, 나 며칠 전에 결혼식 갔었잖아.”
“응. 그랬지.”
칼이 엘에게 끌려 일어나며 대답했다.
“멋지더라. 너무 예뻐.”
“뭐가?”
“신랑하고 신부.”
엘은 뭐가 좋은지 뺨까지 붉게 물들이고는 킥킥거렸다.
“그런데?”
“그러니까 우리도 신전에 가야 해.”
“응?”
“우리도 가서 결혼해야지!”
“엘?”
“걱정마. 내가 지난 번에 아버지 따라가면서 파르카 신전까지 가는 길을 다 알아뒀어.”
“엘! 엘……. 우리는 결혼 할 수 없어.”
칼이 엘의 손을 빼어내며 우뚝 섰다. 엘은 훽 뒤돌아 칼을 노려보았다.
“왜? 왜 우리가 결혼 할 수 없어?”
“엘. 이런 말 하기는 정말 싫지만”
칼이 뒤돌아 섰다. 엘이 제일 싫어하는 칼의 뒷모습이었다.
“난 알로켄이 아니야.”
차는 금방 바닥이 났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하녀를 시켜 더 끓여오게 할까 생각해보았지만 오늘은 차 없이도 옛날 생각을 너무나 많이 할 것 같았다. 하긴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하루 하루 날이 갈수록 비나엘르 파라이의 생각은 더욱 과거로 돌아갔다.
그리고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엘만이 칼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칼도 엘을 너무나 사랑했다는 것을.
엘의 배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했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엘을 칼이 옆에서 부축해 주어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주위에서 누가 수군거리던지 그건 상관없었다. 칼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하고 또렷했다. 집에서 쫓겨난 엘과 칼은 갈 곳이 없었다. 엘은 칼에게 파르카 신전으로 가자고 했다. 왜라고 물었을 때, 엘은 칼에게 늦었지만 결혼식은 올려야지 하고 말했고 칼은 그래 라고 대답했다.
어느 때인가 부터 하이하프에는 눈이 녹아 들지 않기 시작했다. 파르카 신전은 여전히 춥지 않았지만 알로켄들은 하이하프의 추위가 싫어 파르카 신전을 찾지 않았다. 호화로웠던 파르카 신전을 알로켄들은 그대로 기억 속으로 묻어버리겠지만 칼과 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은신처가 될 것이었다. 칼과 엘은 그곳에 보금자리를 잡기로 했다.
엘이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하는 동안, 칼은 파르카 신전에서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하이하프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추워져 칼이 엘과 아이를 위하여 통로를 만든 것이었다. 사랑이 깃든 곳임에도 불구하고 엘은 그것을 보자마자 어둑어둑하다고 다크 홀이라 이름 지었다.
“여긴 다크홀이야.”
“왜?”
“어둡잖아.”
칼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칼의 웃는 모습이 슈마트라 초이와 참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 차는 쓰지도 않아요?”
어느 틈에 비나엘르 파라이의 거처에 들어 선 듀스 마블이 얼굴을 필요 이상으로 찡그리며 다가왔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듀스 마블을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듀스 마블의 날카로운 눈은 전혀 깊지도, 진하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닮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