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누트 샤인이 믿고 의지한 책은 알로켄족의 예언서였다. 누트 샤인은 그랜드 폴이 휩쓸고 지나간 트리에스테 대륙의 숨겨진 비밀을 알로켄족의 예언서를 통해 풀어낼 수 있었다.
그랜드 폴이라는 대재앙이 트리에스테 대륙에 일어나기 이전에 누트 샤인은 인간들에게 점성술과 천문학 등의 지식을 전달해 준, 신의 대리자라 자칭했던 알로켄족의 서기관이었다.
트리에스테의 손꼽히는 미남자였던 누트 샤인은 인간답지 않은 아름다운 외모와 꾸준히 쌓아 온 지적인 능력으로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서기관이라는 직책을 얻었다.
누트 샤인에게는 매일 매일이 행복한 하루였다. 비록 자신이 알로켄족과 같을 수는 없었지만, 알로켄족에 못지 않은 뛰어난 외모와 해박한 지식은 인간들 중 누구에게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누트 샤인은 스스로 자신이 알로켄족과 인간들의 중개자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여겼다.
그림 같이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도 있었다. 아름다운 아내 리엘과 부부를 쏙 닮은 귀여운 아이가 곧 태어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트리에스테 대륙의 인간들이 자신을 우러러본다는 것은 오만함이 넘치는 누트 샤인에게 더 없이 소중한 자부심이었다.
인간의 마지막 전사들이 알로켄족과 목숨을 건 전쟁을 치를 때도 누트 샤인은 전사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알로켄족이 트리에스테를 떠난다면, 자신도 알로켄들을 따라 알로켄족의 은신처인 상계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 자신의 고귀한 아름다움과 서기관이라는 계급을 볼 때, 누트 샤인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알로켄들의 틈바구니였지, 아비규환의 트리에스테 대륙이 아니었다.
하지만 영리한 누트 샤인의 아내 리엘의 생각은 달랐다. 얼음같이 차갑고 냉정한 알로켄족이 누트 샤인을 편애할 리가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누트 샤인도 하급 인간일 뿐이고 당연히 누트 샤인도 떨어뜨리고 갈 것이었다. 리엘은 누트 샤인을 거듭 말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행복과 평화는 모두 먼지처럼 무너져 버렸다.
예정되었던 대로 그랜드 폴은 트리에스테 대륙에 실현되고 말았고, 스스로를 알로켄족이라 착각한 서기관 누트 샤인은 기어코 방주 아르카나를 나서고야 말았다.
그렇게 누트 샤인은 임신한 아내를 남기고 홀로 알로켄족을 찾아 나섰지만 신전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이계의 거대한 암흑에 휩쓸려 버렸다. 그리고 누트 샤인은 방주 아르카나로도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다만 누트 샤인이 그 때 확실히 본 것은 트리에스테 대륙을 자욱하게 덮은 검은 연기 가운데 서 있던 냉엄한 칼리지오 밧슈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지금 인고의 세월 끝에 칼리지오 밧슈의 후손이 누트 샤인의 앞에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것도 같은 은 검을 들고.
누트 샤인은 기막힌 웃음만 나왔다. 배를 잡고 웃어대던 누트 샤인이 고개를 들며 가리온에게 물었다.
“자네 이름이 뭔가?”
가리온은 누트 샤인을 흘깃 쳐다보았다. 쭈그러진 것이 기분 나쁜 눈이었다.
“가리온. 가리온 초이.”
“그래. 그렇군. 그렇다면 슈마트라 초이의 아들인가?”
가리온은 바기족이 아버지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에 놀랐지만, 감정을 숨기며 말했다.
“그렇다.”
“역시 그랬군.”
누트 샤인의 눈이 매서워지는가 싶더니 다시 웃는 낯으로 가리온을 보며 말했다.
“용케도 살아났어.”
가리온은 검을 꽉 쥐었다. 눈 앞의 바기족을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었다. “그래. 그 은 검은 자네 것인가?”
“이것은 인카르의 검이다.”
“아, 그래? 그렇다면 그것은 아니군. 그래. 그랬어.”
누트 샤인은 가리온의 크루어에 관심을 가졌다.
“하긴, 인카르 것들이 인간들에게 기사랍시고 은 검을 주지? 그것이 그 은 검인가? 그래도 우연의 일치치곤 희한한 우연이야. 은 검이라니.”
가리온은 누트 샤인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연이라는 말이 가리온의 마음을 이상하게 흔들었다.
“도대체 무슨.”
“자네의 빌어먹을 조상님 말일세.”
“조상님?”
누트 샤인은 더욱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자네 아버지가 말하지 않던가? 상계를 닫아버린 칼리지오 밧슈의 이름을!”
칼리지오 밧슈. 그랜드 폴을 일으킨 장본인. 인간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트리에스테 대륙에 이계의 문을 열었지만 그 과정에서 사망하게 된 사악한 알로켄.
이것이 칼리지오 밧슈에 대해 가리온이 아는 전부였다.
“칼리지오 밧슈가……. 내 조상이라고?”
“자네가 슈마트라 초이의 아들이면 당연한 것 아닌가?”
가리온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누트 샤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슈마트라 초이는 분명 자신이 친아들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그래. 그래……. 이제야 알겠군. 아까 하늘색 빛은 가리온 자네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었어. 그렇다면 알로켄의 피가 어느 정도는 섞여 있겠군.”
“알로켄의 피?”
“크크. 그것도 모르나? 하긴 인간들이 그런 고매한 진실들을 알 리가 없지. 무지한 것들. 알로켄들은 마력을 검에 입혀 싸운다네.”
“마력…….”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엘리멘터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알로켄과 인간이 다른 점이지. 정신력을 집중하느니 하는 인간 마법사들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힘이야. 알로켄들은 그 힘을 검에 담아서 쓰지.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큰 힘이 모여서 주위의 하찮은 생명들이 죽어 버리거든.”
가리온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트 샤인의 갑작스러운 이야기들이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슈마트라 초이의 신비한 섬광이나, 가리온 자신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했지만, 슈마트라 초이는 자신이 친자식이 아니라고 했었다. 게다가 인간을 몰살시키려던 사악한 알로켄족이 자신의 조상이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가리온은 알 수 없는 이야기들만 늘어놓는 누트 샤인을 노려 보며 말했다.
“쓸데 없는 이야기는 그만 하고, 아까의 빚을 청산하자!”
“크크크. 애송이 주제에 함부로 덤비지 말거라.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너는 갈기갈기 찢어 죽여줄 것이니.”
누트 샤인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가리온은 짐작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가리온 앞에 서 있는 이 바기족은 결코 가리온의 편이 아니었다.
“내 검을 받기나 해라!”
가리온은 검을 세워 누트 샤인에게 돌진했다. 작디 작은 누트 샤인을 위에서부터 짓누를 참이었다. 누트 샤인은 빠르게 내려 찍는 가리온의 검을 옆으로 살짝 피하며 말했다.
“크크크. 지금은 너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일 것인데.”
“뭐라고!”
어느 새 망토를 헤집고 나온 누트 샤인의 촉수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리온을 향해 뻗어 있지는 않았다. 촉수의 흔들림이 심상치 않아 보이던 가리온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푸른 빛이 감도는 넓은 방의 벽과 바닥 사이의 틈에서 스멀스멀 무언가가 형체를 만들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스켈리톤 비숍이군. 저런 것들은 빨아 먹을 피도 없지. 뼈는 좀 빡빡한데 말이야. 크크크.”
누트 샤인이 입을 다시며 말하는 순간, 누트 샤인의 머리통만한 불덩이가 날라왔다.
“컥-.”
누트 샤인은 서둘러 피하려 했지만 칼날 같은 불덩이가 누트 샤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곧 얼굴이 부풀어오르는듯하더니 그곳이 터져 피가 흘렀다. 얼굴에서 피가 터진 누트 샤인의 모습은 그렇지 않아도 흉측한 얼굴을 더 흉물스럽게 만들었다.
“만만치 않겠는걸.”
스켈리톤 비숍들은 꼭 누트 샤인처럼 낡고 찢어진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구리빛이 나는 갑옷이 어설프게 걸머져 있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뼈들과 엉성하게 얹혀 있는 갑옷들 사이로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것은 사람의 머리가 달린 듯한 스태프였다. 그 스태프에 달려 있는 머리의 입이 벌려지면 그 때마다 불덩이가 솟구쳐 나왔다. 가리온에게도 스켈리톤 비숍들의 불덩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리온은 이리저리 피하느라 공격할 틈이 없었다. 누트 샤인도 촉수를 함부로 길게 뻗을 수가 없었다. 스켈리톤 비숍은 포위망을 점점 더 좁혀 들어왔다. 그렇지만 그것이 오히려 누트 샤인과 가리온에게 도움이 되었다.
누트 샤인은 작은 몸을 최대한 수그려 스켈리톤 비숍 가까이로 다가가 반투명한 촉수를 갖다 붙였다. 반투명한 촉수를 타고 하얀 수액이 흘러 들어갔다.
‘뼈까지 녹여 먹다니!’
가리온은 누트 샤인의 모습을 보고 경악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것만 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칼날 같은 불꽃에 데어 언제 누트 샤인처럼 피를 뚝뚝 흘리게 될 지 모르는 일이었다.
가리온은 스켈리톤 폰이 누트 샤인에게 불을 쏘는 사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 틈을 타 가리온은 크루어를 앞세우고 스켈리톤 비숍에게 달려들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반대쪽에 있던 스켈리톤 비숍이 가리온에게 불덩이를 날렸다.
다행히도 불덩이는 가리온의 검에 빗맞았고, 가리온은 그 검을 그대로 스켈리톤 비숍의 가슴에 사선으로 달구어냈다. 스켈리톤 비숍의 단단한 뼈를 그어내는 가리온의 모습을 보며 누트 샤인은 씨익 웃었다.
“그래, 그래. 실컷 싸워 보자구! 어차피 조금 후면 이곳이 자네의 무덤이 될 테니. 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