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오지 마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은색 검을 든, 다이몽 루세의 심장을 터뜨리고 티몬 겐조의 가슴을 뚫은 남자가 느릿느릿 말했다.
모두들 눈앞에서 벌어진 살인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말소리는 물론 숨소리조차 크게 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형제이자 경쟁자이며 친척이었던 사촌과 다섯 살 이후 트리에스테 대륙 전체에서 유일하게 같은 피를 가진 사람이었던 아버지를 잃은 룸바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뭐라고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았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콧잔등만 시큰해졌다.
싸늘한 정적 가운데 다이몽 루세와 티몬 겐조의 피는 대리석 바닥의 홈을 타고 흘러갔다. 어디론가 향하던 핏줄기가 도착한 곳은, 앞쪽에서 숨도 쉬지 못하고 있던 루세 가문 안주인의 긴 치맛자락이었다.
눈시울이 달아오른 다이몽의 어머니는 피로 시뻘겋게 물든 치마를 부여잡더니,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와 동시에 모여 있던 여자들이 하나같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이몽의 어머니는 눈물을 쏟아내며, 목에 잠겨있던 말을 토해냈다.
"아들아! 아들아! 나의 아들아! 나의……. 나의 아들아!"
룸바르트의 볼에도 눈물이 흘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귀에 사방에서 그칠 줄 모르는 울음소리가 비틀려 왔다. 룸바르트는 눈물을 가득 채운 채 무거운 발을 끌어 한걸음씩 디뎠다.
“일어나요. 아버지. 거기 왜 누워있어요.”
흔들리는 룸바르트의 목소리가 낯선 공기를 띠고 있는 티몬 겐조의 구부정한 어깨와 등에 닿아 내렸다. 룸바르트는 평생 구부리고만 있었을 그 휘어버린 몸뚱이를 들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굳기 시작한 몸은 쉽게 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똑바로…… 똑바로. 여기 이렇게 있으면 안돼요……. 네? 아버지.”
룸바르트의 눈물은 입술을 타고 흘러, 티몬 겐조를 흔들고 있는 기다란 손가락을 적셨다. 더 이상 티몬 겐조가 입은 두꺼운 옷조차도 그의 온기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걸, 가슴으로 깨달은 룸바르트는 뜨거운 무언가가 목을 타고 넘어 가는 것 같았다. 룸바르트는 티몬 겐조의 식어버린 몸뚱이를 부여잡았다.
“왜 우리 아버지를! 왜! 왜! 아버지!”
눈물이 그치지 않는 룸바르트는 가슴을 토해낼 정도로 아버지를 부르짖었다. 헬리시타에서, 트리에스테 대륙에서 항상 뒤에 있었던 아버지는 룸바르트에게 자신을 지탱시켜주던 뿌리였다. 룸바르트는 뿌리에서 잘려나간 줄기처럼 티몬 겐조 위로 엎어져 끊임없이 아버지를 불러댔다.
“아버지!”
은검의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울부짖는 사람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듀스 마블을 찾아내었다. 루세 가문의 저택에서 눈물을 글썽이지 않는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남자가 듀스 마블을 노려보자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해 보이는 듀스 마블도 지지 않고 마주 쏘아 보았다.
남자는 갑자기 마구 웃기 시작하더니, 들고 있던 은검을 내동댕이쳤다. 중앙에 걸려 있던 샹들리에의 노란 빛이 크루어에 새겨져 있는 인카르의 문양을 허망하게 비추었다.
듀스 마블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경비병들에게 손짓을 하여 범인을 포박하도록 지시했다.
남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대로 경비병들에게 몸을 맡겼다.
"슈마트라 초이! 살인까지 저지르다니! 역시 기사 놈들은 어쩔 수가 없구나!"
듀스 마블은 마법계 인사들이 보란 듯이 끌려가는 슈마트라 초이의 얼굴에 과장되게 침을 뱉고 따귀를 올려붙였다.
슈마트라 초이의 눈은 듀스 마블을 향하며 잠시 빛나는 듯했지만, 이내 체념해버린 듯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이 놈이. 웃어!"
거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연회를 위해 차려져 있던 음식들을 가져다가 슈마트라 초이에게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이 기사 놈!"
"죽어버려라!"
"에잇, 퉤!"
룸바르트는 흐느끼면서 다이몽과 티몬 겐조의 식어가는 몸뚱이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다이몽의 어머니도 여전히 목놓아 울고 있었다.
사람들이 잡혀가는 슈마트라 초이를 따라 우르르 나가버리자, 부인을 끌어 안고 눈물을 흘리던 다이몽의 아버지는 룸바르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너 밖에 없구나……."
다이몽의 어머니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룸바르트의 바지가랑이를 잡고 통곡을 했다.
"네가, 네가, 우리 다이몽의 원수와 아주버님의 원수까지, 꼭. 네가, 우리 다이몽과 아주버님의 원수를 꼭. 꼭."
룸바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몰려나간 사람들은 슈마트라 초이가 마차를 타려 하자, 그럴 가치도 없다며 직접 말을 끌고 가도록 아우성쳤다.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은 앞발이 거추장스러워지자 땅을 박차며 길길이 날뛰었다.
슈마트라 초이는 말발굽에 여러 차례 걷어차였지만, 그 때마다 다시 일어났다. 그러면 사람들은 길가에 있던 돌을 주워 슈마트라 초이에게 던지며 조소를 퍼부었다.
“이 괘씸한 놈!”
“그것 밖에 못하겠냐!”
아이언 테라클과 잔바크 그레이는 그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이러한 상황은 기사계인 아이언 테라클과 잔바크 그레이에게 결코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언 테라클은 연신 킬킬거렸다.
"잘 되었어. 잘 되었어. 다이몽 루세도 제거되고, 슈마트라 초이도 끌려가고. 잔바크. 이제 너 밖에 없구나."
"그렇지만……. 저희가 슈마트라 초이님을 구해드려야 하는 것 아닐까요?"
"흥, 혈통도 정확하지 않은 사람이야. 저 자는 어차피 절대로 기사계를 주무를 수 없었어."
"그래도, 검성이셨습니다!"
잔바크 그레이는 아이언 테라클이 기사계의 영웅이었던 슈마트라 초이에게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는 당장 뛰어들어 슈마트라 초이를 구해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혼자 힘으로는 무리였기에 타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검성은 무슨, 떠돌이 기사들과 몰려다니다 우연하게 눈에 뜨인 것뿐이야. 그 정도 공은 누구나 세울 수 있어. 일단 공을 세워놓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지. 그리고 저 자는 방금 사람을 죽였다구!"
잔바크 그레이는 슈마트라 초이를 얕잡아보는 아이언 테라클에게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기사계의 전설 운도 마조키에의 후예라면 저런 말은 결코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잔바크 그레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아이언 테라클을 따라가는 것 뿐이었다.
아이언 테라클과 잔바크 그레이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슈마트라 초이를 끌고 간 마차는 헬리시타를 한 바퀴 돈 다음에야 인카르 신전 앞에서 멈추었다.
잔인한 호기심에 가득 찬 헬리시타의 사람들은 그 때까지 계속해서 쫓아다니며 돌을 던졌다. 슈마트라 초이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돌 세례에 몸이며 얼굴이며 성한 곳 하나 없이 순식간에 온 몸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 올랐다.
아이언 테라클과 잔바크 그레이도 끝까지 뒤를 밟아 인카르 신전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슈마트라 초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일단 방을 잡고 경과를 지켜보자. 우리가 나설 만한 적당한 때가 올 것이야."
아이언 테라클은 잔바크 그레이를 데리고 인카르 신전이 보이는 여관으로 들어갔다.
방을 잡은 아이언 테라클은 웬일인지 실내에 들어오자마자 커튼을 쳐 버렸다.
"슈마트라 초이님이 괜찮으실까요?"
"그 자를 걱정할 때가 아니야."
"예?"
"아까 우리를 보던 여관 주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어. 우리부터 조심해야 해. 숨 소리도 나지 않게 조용히 하고 있게."
아이언 테라클은 소심하고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잔바크 그레이는 이런 아이언 테라클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답답하고 꺼림칙했다.
“휴.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 없이 방 안을 한참 왔다 갔다 하던 아이언 테라클은 마침내 은밀하게 말을 꺼냈다.
"듀스 마블은 아마도."
"아마도?"
"사죄 의식을 택할 걸세. 기사들과 궁수들에게 본보기로 내보이겠지." "사죄 의식이요?"
비슷한 시각, 듀스 마블도 아이언 테라클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사죄 의식을 하는 것이……."
지금이야말로 슈마트라 초이를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기사계와 궁사계를 혼내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듀스 마블이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보람이 있구만.”
듀스 마블은 서둘러 긴급 조디악 회의를 소집할 전령들을 내보냈다.
다음 날 새벽, 룸바르트 겐조의 집에도 인카르 신전의 전령이 찾아왔다. 그들은 아직 신관에 오르지 못한 시에나 같은 마법사들로 추후에 조디악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전령을 따라 인카르의 신전에 도착한 룸바르트가 제일 먼저 안내된 곳은 듀스 마블의 집무실이었다.
룸바르트는 붉은색 일색인 듀스 마블의 집무실 가운데에 놓여진 의자에 앉혀졌다.
"자네, 괜찮은가?"
듀스 마블은 책상 앞에 앉아 룸바르트를 물끄러미 건너다보며 말했다.
"예……. 괜찮습니다……."
룸바르트는 간신히 대답했다. 지난 밤을 꼬박 새운 룸바르트의 몰골은 볼썽 사나울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간밤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룸바르트는 시간이라는 것이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제 일은 나도 매우 유감이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듀스 마블은 룸바르트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 사건을 본보기로 우리 인카르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룸바르트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듀스 마블을 쳐다보았다.
"자네도 참여하지 않겠나?"
룸바르트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룸바르트였다.
하지만 듀스 마블은 그 행동을 룸바르트가 허락하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잠시 후 듀스 마블은 룸바르트를 데리고 회의장으로 향했다.
"걱정할 것은 없네. 자네는 그저 티몬이, 그러니까 자네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앉아 있기만 하면 되니까."
이렇게 해서 인카르의 신전에서 반년마다 소집되었던 조디악의 회의는 단 이틀 만에 다시 열렸다. 그러나 열 두 신관이 모두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기사계의 아이언 테라클과 궁사계의 아이리스 비노쉬, 그리고 인카르의 최고 권력자 비나엘르 파라이가 빠진 단 아홉 명의 마법사만이 참여한 궁색한 회의였다.
듀스 마블은 티몬 겐조가 앉던 자리에 임시 서기 룸바르트를 앉혔다. 듀스 마블이 룸바르트를 인카르로 불러 온 것은 동정표를 얻기 위함이었다.
듀스 마블의 계산은 정확히 맞아 떨어져 룸바르트가 티몬 겐조의 자리에 앉자 마자 조디악들 사이 곳곳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듀스 마블은 이 분위기를 그대로 타며 새벽의 차가운 회의실 안의 공기를 가느다란 입술에서 쏟아져 나오는 웅변으로 달구었다
"인카르를 수호하는 조디악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놀라운 결정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살인자 슈마트라 초이에 관한 일입니까?"
“우리는 그를 심판해야 합니다!”
조디악들은 웅성거렸다. 회의에 참여한 아홉 명의 마법사 모두는 사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바로 살해 장면의 현장 목격자이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지난 밤, 슈마트라 초이는 인카르의 예비 파견관 다이몽 루세와 인카르의 오랜 서기관 티몬 겐조를 살해하였습니다. 그것도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회의장에 모인 신관들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그는 왜, 마법계 인사들을 죽인 것일까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도대체 왜 슈마트라 초이는 인카르의 인사들을 골라서 죽인 것일까요!"
듀스 마블은 어두운 얼굴로 신관들에게 침을 튀기며 외쳤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카르에, 헬리시타에 반역하기 위해서입니다!"
"아!"
회의장 전체가 술렁거렸다. 마법사들은 큰 비통함에 젖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룸바르트만이 펜을 들지도 않은 채, 전혀 꼼작하지도 않고 앉아 있었다.
사실 슈마트라 초이는 처음부터 다이몽 루세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티몬 겐조까지 살해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모두 듀스 마블이 꾸민 각본이었다. 그리고 듀스 마블은 지금의 결과를 이용해 슈마트라 초이의 지난 공적까지 모두 사악한 것으로 바꾸어 철저한 악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슈마트라 초이는 간교하게도 오래 전부터 꾸민 일을 차근차근 실행해왔던 것입니다."
듀스 마블은 선동된 아홉 명의 마법사들을 향하여, 표독스러운 얼굴로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해 왔던 시나리오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슈마트라 초이가 처음 세운 계획은 밀교 노라크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라크 교도들을 이용했단 말씀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슈마트라 초이가 직접 노라크 교도들을 잡아들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 자가 무서운 놈이라는 것을, 배반을 밥 먹듯이 하는 놈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모든 것은 슈마트라 초이가 계획한 것이었습니다.”
듀스 마블의 얼굴은 홍조를 띄웠다.
“슈마트라 초이는 밀교 노라크의 단원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신관들은 이구동성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그 자리에서 듀스 마블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슈마트라 초이는 권력에 눈이 먼 나머지, 자신이 몸담고 있던 밀교 노라크를 배신하고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같은 신도였던 노라크 교도들을 잡아서 우리에게 바쳤던 것입니다!"
듀스 마블이 슈마트라 초이를 악마보다도 사악한 자로 몰아가는 사이, 그는 인카르 신전 지하에서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슈마트라 초이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키를 가진 작고 뚱뚱한 사내는 가늘고 뾰족한 꼬챙이를 집어 들더니, 슈마트라 초이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난 네 놈을 알아. 네 놈이 밀교도를 싹쓸이했다며 헬리시타의 중앙로를 걸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지. 그 때 말이야……. 킥킥. 멋지게 가는 네 놈을 한 번 건드려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오늘에서야 이렇게 기회가 오는 군……. 킥킥.”
작고 뚱뚱한 사내는 가늘고 뾰족한 것을 슈마트라 초이의 몸에 꾹꾹 눌러 보았다.
“이런 쇠꼬챙이는 배나 허벅지 같은 살이 펑퍼짐한 곳에 찔러서는 제 맛이 안 나지. 이렇게 해야 하는 거라구.”
작고 뚱뚱한 사내는 작은 몸을 더 웅크리더니, 나무에 매달려 있는 슈마트라 초이의 발끝에 꼬챙이를 가져다 대었다.
“기다려봐. 오줌을 찔끔 싸게 해 줄 테니까. 킥킥.”
고문관은 끝이 뾰족한 꼬챙이를 하나씩 슈마트라 초이의 발톱 밑에 꽂아 넣었다.
푹-. 푹-.
쇠꼬챙이가 발톱 밑을 쑤시고 들어갈 때마다 발톱과 살을 경계로 벌어진 곳에서 붉은 피가 조금씩 흘러 나왔다.
“으윽…….”
“어라. 비명 소리가 나오질 않네. 느낌이 별로야? 킥킥. 그래. 좋았어. 검성은 좀 다르단 말이지? 그래. 그래. 다른 걸로 해주지. 킥킥.”
작고 뚱뚱한 고문관이 다른 고문기구를 찾으러 자리를 뜬 사이 슈마트라 초이의 가슴 속에는 울컥하는 억울함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듀스 마블의 집무실 앞에서 내내 기다렸던 슈마트라 초이는 해가 질 무렵에야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기다렸습니다.”
“아니, 아직까지 있었단 말입니까?”
듀스 마블은 집무실 문 앞에 서며 말했다.
“부탁 드린 기사계 파견 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슈마트라 초이는 듀스 마블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하자는 말이 없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허허. 참, 이 사람.”
듀스 마블은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당신, 언제부터 나에게 부탁을 할 수 있었소?”
“예?”
“우리 단 둘 뿐이니, 터 놓고 이야기합시다.”
듀스 마블은 집무실 문을 열어 슈마트라 초이가 들어오도록 하였다.
“자, 앉으시오.”
슈마트라 초이는 듀스 마블이 시키는 대로 앉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지요?”
“예, 그것은……. 듀스 마블님의 원정 때.”
“흐흠……똑똑히 기억하고 있군. 그렇다면, 이것도 기억하겠군요.”
“무엇을?”
“슈마트라 초이, 당신이 도적단에 있던 떠돌이 기사였다는 것.”
고아였던 슈마트라 초이는 살아 가기 위해 도둑들의 패거리에 끼어 떠돌았다. 그런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 것이 듀스 마블이었다.
듀스 마블은 원정을 떠나면서, 크레스포 내로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상징적 인물이 하나 필요했고, 빛을 내는 검을 휘두르던 슈마트라 초이는 그 역할에 제격이었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떠돌이 기사였기 때문에 듀스 마블이 크레스포 내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소문이 날 염려도 없었고, 검에서 빛이 나 사람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데도 좋았다. 게다가 슈마트라 초이의 검술 실력은 듀스 마블이 기대하던 것 그 이상이었다. 그런 이유로 듀스 마블은 여러 도적단의 기사들 중에서 슈마트라 초이를 뽑아내었다.
하지만 예리한 듀스 마블은 다가올 장래에 언젠가는 슈마트라 초이가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교활한 듀스 마블은 슈마트라 초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계획을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세워왔던 것이다.
“그것은!”
“그래, 그랬었지요. 내가 당신을 양지의 세계로 끌어내 준 것이지요. 내가 아니었으면 검의 빛을 이용해 잔꾀나 부리는 떠돌이였던 당신이 청기사로서 공이라도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슈마트라 초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검을 잡았던 그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디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문제의 빛의 힘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그는 도움보다 더한 아픔을 겪어 왔다. 그 빛 하나로 슈마트라 초이는 검성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지만, 또한 그 빛 때문에 그는 기사로서의 정통성을 계속 의심 받아 왔다. 기사가 아닌 마법사, 인카르의 끄나풀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다.
그것을 지우기 위해 슈마트라 초이는 지난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사방에서 모여드는 빛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서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해 왔다.
슈마트라 초이의 빨개진 얼굴을 보며 듀스 마블은 능글맞게 물었다.
“오, 이런. 내가 약점을 건드렸나요?”
슈마트라 초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걱정 마시오. 검성 슈마트라 초이가 도적단의 떠돌이 기사였다는 것은 내가 비밀로 해줄 터이니. 다만.”
듀스 마블의 눈이 가늘게 번쩍였다.
“슈마트라 초이 당신이 정말로 기사계를 얻고 싶다면……. 방법이 있기는 있지요.”
슈마트라 초이는 듀스 마블을 노려보았다.
“아까 회의 중에 잔바크 그레이라던 젊은이가 쓴 방법이기도 한데…….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무엇입니까?”
“기사답게 싸워서 이기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기사계도 얻게 되고, 검성의 치욕스러웠던 지난 과거도 묻혀질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듀스 마블이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낮게 웃었다.
“그런데 말이지. 당신은 검성이니 거기에 걸맞은 무언가 더 큰 걸 걸어야 하지 않겠소? 예를 들면, 목숨이라던가…….”
슈마트라 초이는 입술을 깨물며 듀스 마블을 노려보다가 무겁게 입을 떼었다.
“돌리지 말고, 확실히 말하시오.”
“흐흐흐. 실은 말이오. 오늘 저녁에 아까 회의에서 새로 기사계를 받은 다이몽 루세의 집에 갈 예정이거든. 그 곳에서, 내 눈 앞에서 그의 목숨을 끊어 놓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