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este_대륙의 전쟁 - 15장. Trieste. 트리에스테: 불멸
| 21.02.03 12:00 | 조회수: 3,525


달빛은 계곡으로 쏟아졌다. 달빛이 고목 나무에 은은히 비취는 것과는 달리, 그 아래에서는 노라크 교도들의 축제가 벌어졌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중앙의 화톳불은 활활 타올랐다. 그 위로 검은 아지랑이가 솔솔 올라왔다. 매캐하고 야릇한 아지랑이는 이성을 어지럽게 했다.

앤드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 같은, 기운을 빠지게 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앤드류는 마음을 다잡으며 발길을 돌렸다. 지금이야말로 발을 뺄 때였다. 더 있으면 늦는다, 두렵고 어두운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는 생각에 앤드류는 허둥지둥했다. 그러자 노라크 교도 하나가 앤드류를 붙잡았다.

“앤드류, 어디를 가나?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 아닌가?”

“나, 나는. 나는. 복수의 빙곡에 가려고. 뷰라보랜더님이 부활하시는 것을 봐야지.”

“다른 백기사단은 데리고 가지 않나?”

“아. 그게. 그렇지. 같이 가야지. 자. 가자. 이제 뷰라보랜더님이 부활하실 거야.”

앤드류는 솔직하지 못했다. 사실은 카론의 부활이 두려워 도망치는 거라고 말하지 못했다. 졸이는 마음을 감추며 돌아서는데, 앤드류 앞에 비나엘르 파라이가 나타났다. 앤드류는 보는 순간 정지했다.

“당신은!”

앤드류는 비나엘르 파라이를 훑었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두 손에 흰 검이 있는 것이 보였다. 앤드류와 백기사단은 바로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여기! 여기를 봐! 비나엘르 파라이다!”

당황한 앤드류는 다짜고짜 노라크 교도들을 불렀다. .

“뭐?”

노라크 교도들은 축제를 멈추고 몸을 돌렸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나타났다!”

앤드류는 곧 노라크 교도들이 비나엘르 파라이에게 달려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백기사단이구나.”

비나엘르 파라이는 앤드류에게 관심을 보였다.

“…!”

앤드류는 비나엘르 파라이를 보았다. 낮은 목소리가 이렇게 나긋할 줄 몰랐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눈은 따사롭기까지 했다.

‘내가 착각하는 건가.’

앤드류는 이상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았다.

“다들!”

이제까지 미친 듯이 춤추며 횃불을 빙빙 돌던 노라크 교도들이 모두 땅에 엎드렸다.

“뭐 하는 거야?”

앤드류는 노라크 교도들이 신비한 주술이라도 쓸 모양으로 엎드려 있는가 하다가, 깨달았다. 노라크 교도들은 비나엘르 파라이를 향해 절을 한 것이었다.

“지금!”

앤드류는 비나엘르 파라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함정이었나! 노라크! 너희들은 비나엘르 파라이와 손을 잡고 의식이며 제사며, 모두 거짓으로! 그래. 오래 전 그날처럼 백기사단을 잡기 위해!”

격분한 앤드류와 달리 비나엘르 파라이는 조용히 물었다.

“가리온을 구해주었다지? 그것도 두 번이나.”

앤드류는 비나엘르 파라이가 의도하는 바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사악한 힘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백기사단을 이용하는 것쯤, 비나엘르 파라이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그…. 그래.”

“내가 가리온을 너희에게 보냈지.”

비나엘르 파라이의 말에 앤드류는 가리온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래. 가리온이 말했지. 우리를 찾으면 아버지와 듀스 마블을 찾게 될 거다… 하고.”

“그래.”

“무슨 뜻이지?”

“앤드류.”

노라크 교단의 지도자는 일어나 앤드류에게 다가왔다.

“우리를 아직도 믿지 못하는군. 잘 듣게. 오늘의 의식이 있기까지. 모두 비나엘르 파라이님이 준비한 것이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제단 앞에 서자 시에나는 앤드류처럼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그런 시에나에게 차분히 말했다.

“너는. 나와 비슷하다. 내가 사랑한 사람은, 가리온처럼 선택 받은 자였다.”

“역시, 칼리지오 밧슈와!”

비나엘르 파라이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지만 미소를 지었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미소는 오랜 그리움 끝에나 볼 수 있는 그런 작은 미소였다.

“칼은 선택 받은 자의 운명을 따라야 했어. 그는 그런 존재였지. 그는 그랜드 폴을 시작하고 끝맺음 역시 자기 손으로 했다. 덕분에 알로켄은 상계로 갔고, 인간들은 안전해졌지. 그러나 단 하나.”

“….”

“우리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시에나는 비나엘르 파라이가 자신을 설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에나도 가리온을 사랑하기에, 운명을 따라야 하는 자를 사랑하는 슬픔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넌 나와 다르다. 너는 나와 달리 선택할 수 있다.”

“선택이요?”

“너는 운도 마조키에의 후예. 또 다른 중간자다. 가리온이 알로켄의 피를 가졌고, 너는 이계의 피를 가졌지. 이 트리에스테라는 땅은 조화의 힘으로 창조된 대륙. 그래서, 어디에나 조화의 힘이 필요하다. 가리온과 너는. 그 조화의 산출이자. 이 땅의 열쇠야.”

비나엘르 파라이는 시에나에게 말했다.

“네가 조금만 수고하면, 너는 가리온과 함께 할 미래를 열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사랑을 되찾아 줄 수도 있지.”

“카론의 부활을 바라시나요?”

“내가 바라는 것은. 단 한 번.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그래. 그뿐이야.”

“카론이 부활하면 칼리지오 밧슈를 볼 수 있나요? 가리온과 저는 어떻게 되죠?”

“모든 것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너에게 알려줄 것이 있지.”

“…?”

“어째서 알로켄이 상계로 가고자 했는지 알려주마.”

시에나는 긴장한 상태로 비나엘르 파라이의 말을 새겼다.

“알로켄은 허상의 존재. 무서운 인간의 상념으로 태어난 존재다. 인간들이 그것을 깨닫고, 우리의 존재를 부정할 때. 우리는 먼지처럼 사라지게 되지. 소멸하게 되는 거야. 그게 바로 알로켄의 죽음이다.”

“가리온도 소멸하게 되나요?”

“아마도.”

비나엘르 파라이는 짧게 대답했지만, 시에나는 그 어떤 말보다 무섭게 들렸다.

“지금 너처럼, 알로켄 역시 소멸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차원의 문을 열어 인간들과 멀리 떨어지기로 했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대륙의 조화와 혼돈을 다스릴 수 있는 중간자들뿐. 그래. 중간자들의 소명이 바로 그것이었지.”

“그렇다면 칼리지오 밧슈는!”

“시에나. 네가 가진 소명을 알겠느냐?”

시에나는 비나엘르 파라이가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카론의 부활, 그랜드 폴의 재현. 비나엘르 파라이가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가리온 또한 원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대륙을 지키려 할 것이다.

“하지만 가리온은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가리온이 소멸하기를 바라느냐?”

시에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리온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나날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혼란스러워하는 시에나에게 은 검을 건넸다.

“이걸 받아라. 이 검으로 너희들의 피를 깨워라.”

시에나는 흰 천으로 싼 검을 잡아 들었다.

“그래야. 가리온이 소멸하지 않아.”

시에나는 소멸이라는 말에 판단력이 흐려졌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건넨 검을 헐겁게 잡고 일행의 어깨를 조금씩 그어 내렸다. 찌를 때 마다, 어깨의 상처가 욱씬 아팠다.

“너의 피도 섞어라.”

시에나는 망설이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말대로 움직였다. 그 순간 시에나는 자기도 모르게 노라크 교도들이 주었던 두루마리의 주문을 노래했다.

“빛보다 밝고 암흑보다 짙은 물길을 터라. 상계를 지키는 파수꾼의 노래, 이계 가는 뱃사공을 부르는 노래…. 달 겹치듯 나란히…. 트리에스테에 울리니. 계약으로 엮인 피가 출렁이리. 알로켄과 사람의 중간자. 가리온 초이. 사람과 이계의 중간자. …. 시에나 오틴. 모든 조화로운 것들의 대표자가. 코스모스와 카오스…. 차원의 문을 피로써…. 열리.”

여섯의 피가 땅을 타고 흘렀다. 노라크 교도들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가리온은 서서히 눈을 떴다. 꽤 오랜 잠을 잔 것 같았다. 덜 뜬 눈에는 나무와 종이가 흐드러지게 날리는 것이 보였다. 매캐한 연기. 숨을 못 쉴 것 같은 느낌. 예전에 이런 광경을 보았다.

“또 꿈인가.”

“가리온. 이제 너의 할아버지를 뵙겠구나.”

“가리온!”

비나엘르 파라이. 그리고 시에나. 모두 꿈에서 보았던 얼굴이다. 다만 시에나와 자신의 몸은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웠다. 가리온은 얼굴을 문질렀다. 이 꿈의 끝이 늘 좋지 않았기에 꿈에서 깨어나려고 애썼다. 그런데 애쓸수록 비나엘르 파라이와 시에나의 모습은 더 뚜렷해졌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에게 와라! 나에게 와라!”

“…!”

가리온은 벌떡 일어났다. 꿈이 아니라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됐다. 분명 칼리지오 밧슈의 음성이다.

“어디서 들리는 거지?”

“가리온!”

“무슨 일이 벌어진 거요?”

가리온이 물었지만 시에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떨구었다.

“별일 아니에요. 그저.”

순간, 바람이 심하게 몰아쳤다. 모든 소리가 일순간에 묻혔다. 바람과 달 빛 아래 고요한 한 고목이 드러났다.

“이 장면은!”

가리온은 시에나를 보았다.

“카론이 부활하는 거요?”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곧 달빛을 받은 나무에 황금색 불이 붙었다. 나무는 타오르기 시작했고, 땅은 갈라지며 요동쳤다. 이계의 기운이 갈라진 땅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노라크 교도들은 앞다투어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카론이 부활하고 있어...!”

가리온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깊이 빠져버린 탓에, 손 한 번 쓰지도 못하고, 대륙을 멸망으로 몰고 왔다는 자책감을 견디기 힘들었다.

“내 책임이야.”

“가리온!”

“내 증오스런 피 때문에 카론이 부활한 거야…. 그러니 내가 책임을.”

방어구도 입지 않은 가리온이 고목나무로 달려가려 했다. 시에나는 가리온을 말렸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렀다.

“가리온! 당신 책임이 아니에요! 가지 말아요! 가면 안 되요!”

가리온은 시에나를 빤히 쳐다 보았다.

“… 당신이 또 다른 중간자?”

“…!”

“왜 하필! 그렇다면 당신이 이 일을 저질렀소?”

시에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이 미웠다.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다 사정이 있어요. 들어보세요. 당신과 나는….”

“당신은 늘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군!”

“가리온! 그게 아니에요! 당신을 사랑해서!”

“가냘픈 당신을. 늘 지켜주고 싶었는데. 사죄의식 때 듀스 마블을 두둔할 때. 그것을 깨달았었는데. 언젠가는 당신을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런데 당신은 이렇게! 결국! 나를 궁지로 모는군!”

“그런 게 아니에요! 내 말을 들어보세요!”

가리온은 눈물로 가득한 시에나가 안타까웠지만, 차갑게 물리쳤다.

“당신은 내가 죽을 길을 열어 줬소. 대륙의 악마라고 불릴 기회를 마련해 줬소. 좋소. 내가 가리다.”

“가리온!”

“….”

룸바르트는 머리 속이 뱅뱅 도는 것 같았다. 속이 메스꺼워 토할 것 같기도 했다. 정신이 어지러운 가운데 옆에 에바가 보였다.

“에바. 우리 어떻게 된 거지?”

“룸바르트.”

에바는 멍하니 서 있었다.

“들었어? 지금. 가리온이. 한 얘기?”

비나엘르 파라이는 고목으로 달려갔다. 팔락거리는 흰 종이에서 하얀 영혼의 모습들이 솟아 고목을 돌았다. 사실 고목은 모두 무덤이나 다름 없었다. 그랜드 폴이 끝난 후, 사람들은 시체 위에 나무를 하나씩 심었다. 칼리지오 밧슈를 찾아 헤매던 비나엘르 파라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나무들을 모조리 방주에 모았다. 그리고 일년도 채 되지 않아 썩은 나무들만 남기고 모두 불살랐다. 카론의 힘이 깃든 나무가 생명을 오래 유지할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의 칼이. 저기에!”

비나엘르 파라이는 기대했다. 이제서야 칼리지오 밧슈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감격에 벅찼다. 그가 나타나면 당신을 보기 위해 기다려왔노라고, 당신을 꺼내주려고 자신이 이렇게 준비했노라고 말할 참이었다. 처음 아들 슈마트라 초이를 알게 되고, 선택 받은 중간자 가리온 초이를 만나게 되고. 세그날레와 손 잡아 두 번째 중간자 시에나를 찾아내고. 마지막으로 의식이 진행될 장소를 찾기 위해 누트 샤인의 뒤를 밟은 것까지. 모두 이야기하리라 마음 먹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칼!”

말라있던 하늘에서는 번개가 내려쳤다. 활활 타오르던 고목은 반으로 쪼개졌다. 나무는 털썩 쓰러진 게 아니라, 먼지가 되어 사방에 퍼졌다. 카론의 상징, 검은 안개가 아닌 붉고도 노란 빛이었다.

“아아! 달라! 그 때와는 달라! 봐! 검은 안개도 심하지 않고! 끔찍한 카론의 모습도 없잖아! 역시 칼이 카론을 물리친 거야!”

비나엘르 파라이는 기뻐 소리쳤다.

“칼! 칼! 어디 있지?”

빛은 점차 가라앉았다. 그 가운데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평범한 키에 평범한 덩치. 그러나 얼굴은 빛에 가려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칼? 나의 칼이야?”

비나엘르 파라이는 달려갔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덥석 만지며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그에게 얼굴은 없었다. 눈알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었다.

“어디 있지? 내가 좋아하던 눈동자는 어디 있지?”

비나엘르 파라이는 손을 떼려 했다. 그러나, 한 번 붙인 손은 떼어지지 않았다.

“칼이 아니야…!”

비나엘르 파라이는 발버둥치다가 검을 쓰려 했다. 알로켄의 힘을 발휘해서 빠져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검이 나오질 않았다.

“왜 안 나오지? 칼! 나의 칼은 어디 있는 거지?”

심장을 얼리는 굉음이 비나엘르 파라이에게 말했다.

“신의 말을 하는 자여. 그가 나와 함께이며, 나는 그와 함께이다. 계약의 힘으로 트리에스테 대륙의 모든 것은 내가 되고, 그가 되리라.”

얼굴 없는 사람 등에서 괴물의 머리를 가진 검은 안개가 솟아 나와 비나엘르 파라이를 삼켰다. 은발과 순백의 비나엘르 파라이는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대륙의 여신이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님이…!”

“너 때문에 모두가 위험해졌어.”

시에나는 뒤돌아 보았다. 시에나가 칼로 찌른 일행들이 어느덧 일어서 있었다.

“시에나.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번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소.”

캄비라 바투는 슬펐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위험해졌어.”

에바는 시에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니. 넌 사라져.”

에바는 차가운 말 끝에, 돌이키지 못할 일을 저질렀다. 에바의 화살은 시에나를 향했다. 세지타의 화살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시에나는 가녀린 가슴에 화살을 맞았다.

“아!”

시에나는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시에나!”

“에바!”

가리온은 시에나를 안았고 캄비라 바투는 시에나를 향해 달려갔다. 룸바르트는 놀라 에바의 이름을 외쳤다. 에바는 멈추지 않고, 한번, 또 한 번. 활 사위를 당겼다.

“허억. 가리온…. ”

“시에나!”

“이걸…. 혹시…. 필요할지도.”

시에나는 요정의 호수에서 가져 온 물병을 가리온에게 건넸다.

“하아…”

시에나는 가리온을 향해 팔을 뻗으며 눈을 감았다. 캄비라 바투는 도끼를 집어 들었다.

“시에나!”

가리온의 외침 뒤로, 룸바르트가 에바를 다그쳤다.

“왜 그래!”

“저 여자가 다 무너뜨렸어. 저 마녀가! 나는 사죄의식 후에 가리온을 일으켜 세웠어. 어머니의 유품도 전부, 가리온을 위해. 오직 가리온만을 위해 다 줬어. 그런데 가리온이 저 여자를 안겠다고? 난 인정할 수 없어. 우리는 저 여자 때문에 다 죽게 생겼는데!”

“정신차려!”

룸바르트는 에바의 뺨을 올렸다.

“…!”

“뭐에 홀린 거야? 갑자기 왜 그래?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룸바르트의 발개진 눈에, 에바는 눈물이 났다.

“나도 듣고 싶었어! 가리온에게! 사랑한다! 안아주고 싶었다! 지켜주고 싶었다! 그런 말! 나도 여자라서 듣고 싶었어!”

에바는 룸바르트의 가슴을 두드리며 가슴 속의 응어리들을 눈물로 쏟았다. 룸바르트는 에바의 손을 잡았다. 늘 강한 척 하는 모습이 자신과 닮아서 모른 체 할 수 없었던 에바를 룸바르트는 안아 주었다.

“에바. 내가. 내가 해주면 되잖아. 내가….”

“안돼!”

가리온의 외침과 동시에 에바에게 룸바르트의 무게가 느껴졌다.

“…. 룸바르트?”

“나. 죽는 것 같은데?”

룸바르트가 웃으며 말했다. 미남자인 룸바르트의 얼굴이 다정하게 빛났다. 에바는 룸바르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룸바르트….”

“어떻게 죽든. 널 위해서일 테니까…. 괜찮아.”

룸바르트는 말을 마치고 에바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룸바르트.”

에바는 룸바르트의 머리칼을 자세히 보았다. 조금은 두꺼운 은발에 가까운 긴 머리. 예전에는 이렇게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 머리 위에 에바의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룸바르트….”

룸바르트의 등에 도끼가 꽂혀져 있었다. 단 한 번도 잡아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다.

“…. 당신도 사랑의 바보로군요.”

캄비라 바투는 무릎을 꿇었고, 에바는 조용히 룸바르트를 눕혔다. 가리온은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벌어졌다는 죄책감에 돌아섰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가리온은 카론, 칼리지오 밧슈의 모습을 한 이계의 괴물을 향해서 서서히 걸어갔다.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래. 네가 내 운명이지.”

가리온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 너를 꺾으면. 내 빌어먹을 운명을 꺾은 게 되는 거겠지?”

가리온은 달렸다. 더 이상 고뇌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아프기만 한 모습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가리온의 양 팔에서 두 개의 검이 나왔다. 가리온은 그 검에 시에나의 유품을 뿌렸다. 괴물은 몸을 점점 더 불렸다. 붉고 노란 빛은 사라졌고, 이계의 기운만이 가득 찼다. 방주를 터질 듯이 채운 검은 괴물이 가리온을 향해 다가왔지만, 가리온은 더 이상 물리적인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에네제릭 블레이드!”

가리온은 카론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괴물은 조금 움찔하더니 검은 안개를 더욱 짙게 하며 무서운 속도로 불쑥 불쑥 튀어 나왔다.

“나를 방해하는 자. 끝 없는 어둠에 갇히게 되리라!“

비나엘르 파라이에게 들렸던 굉음이 가리온을 향해 내리쳤다.

“사이클론 크래쉬!”

가리온은 두렵지 않았다. 가리온은 회전하면서, 뱀 같은 검은 괴물들의 머리를 휘감았다. 괴물들은 그 순간에도 가리온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가리온은 검은 안개가 시시각각 자신에게 침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론의 힘인 고통스러운 죽음의 기운이 뇌에 차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그러나 가리온은 어느 때보다도 평안했다. 마지막 한 방에 모든 것을 걸면, 지금까지의 고민도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리온은 몸을 격하게 회전시켰다. 그리고 바람을 들고 일어나 카론의 몸 가운데로 검을 내리칠 준비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론에게 외쳤다.

"나는 트리에스테 대륙의 영웅! 슈마트라 초이의 아들이자, 인카르의 청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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