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este_대륙의 전쟁 - 14장. The Holy of Holies. 아르카나로 가는 길
| 21.02.03 12:00 | 조회수: 16,915


바라트에서, 누트 샤인은 통 갈피를 잡지 못했다. 누트 샤인이 정확히 알지 못하기도 했지만, 워낙 비나엘르 파라이가 아리송하게 말하기도 했다.

"아니. 그게 아니야. 다시 잘 생각해 봐.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그게 아니야."

“….”

사실 비나엘르 파라이로서는 누트 샤인에게 정확히 말해 줄 이유가 없었다. 비나엘르 파라이에게 누트 샤인은 미미한 존재였다. 그가 알던 모르던, 누트 샤인 때문에 비나엘르 파라이가 달라질 바는 없었다. 그저 비나엘르 파라이에게는 누트 샤인이 가지고 있는 유물이 필요했다. 그 유물을 보고 확인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트 샤인이 순순히 유물을 넘길 리는 없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서서히 누트 샤인을 향해 걸었다. 누트 샤인은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다가, 비나엘르 파라이를 보고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라!”

서기관의 자리에서 칼리지오 밧슈가 앉아 있던 곳을 보고 있던 누트 샤인, 그리고 운도 마조키에의 의자 앞에 나타난 비나엘르 파라이는 어느새 누트 샤인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누트 샤인은 비나엘르 파라이가 점점 다가오는 것이 의심스러워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누트 샤인이 저지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트리에스테, 인간들의 땅 위에서 비나엘르 파라이를 거역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멈추지 않자, 누트 샤인은 촉수를 올렸다.

“멈춰.”

누트 샤인은 촉수를 세우며, 뒤로 점점 물러섰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순순히 누트 샤인의 말을 들을 자가 아니었다.

“누트 샤인, 아마도 네가 생각하는 열쇠는 슈마트라 초이겠지. 그래. 나도 한 때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아니라니!”

“그것 말고, 다른 게 있더란 말이지.”

비나엘르 파라이는 서기관의 책상에서 등을 돌려 잠시 칼리지오 밧슈의 자리를 보았다. 자리를 가만히 쓸던 비나엘르 파라이는 누트 샤인에게 말했다.

“넌 칼리지오 밧슈를 미워하지?”

“하. 하하. 미워하냐고? 미워하냐고? 미워하냐고 물었어? 비나엘르 데비나 파라이. 아니, 칼의 엘! 난 그 자를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저주한다. 증오하고 죽이고 싶다. 지금쯤 상계에서 잘 살고 있을 그 자의 이기심 때문에 치가 떨리고 밤잠을 설친다!”

“이기심?”

비나엘르 파라이는 기막힌 듯 웃었다.

“그는 인간을 사랑했어. 그런 그가. 어떤 이기심이 있어서 그랜드 폴을 이행했겠어?”

“흥. 인간을 사랑한 자가 대륙에 악마를 풀어 놓나? 칼리지오 밧슈를 너무 믿는군.”

“너 같은 인간이 그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땅에 있다는 것이 치욕스럽고 구역질나는구나.”

비나엘르 파라이는 누트 샤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게 넘겨라. 그것은 너의 것이 아니다.”

“내가 왜 너에게 주어야 하지? 이것은 내 것이다!”

“서기관 누트 샤인. 너의 주인을 섬겨라.”

“내 주인은 네가 아니다. 흥. 비나엘르 파라이. 인간의 피가 섞인 칼리지오 밧슈와 결혼할 때부터 내가 알아 보았다. 욕망에 못 이겨 그를 가졌지만, 그는 너와 너의 아들만 남기고 죽어버렸지. 그래, 그래서 그가 죽으니까, 아주 이제는 더럽게 뒹굴면서 인간인 척 여신으로 행세하고! 그런 더러운 너를 내가 주인으로 받아들일 것 같으냐! 넌 이미 알로켄이 아니다!”

“이 땅은 나의 것이다.”

“건방진 것. 내가 모시는 고결한 알로켄은 너 따위와 차원이 다르다!”

“그래?”

비나엘르 파라이는 누트 샤인을 향해 성큼 가까이 왔다. 누트 샤인은 비나엘르 파라이를 향해 대담하게 큰소리친 것도 잊은 듯 벌벌 떨었다. 머리 속 의지와 상관없이, 누트 샤인의 변형된 몸뚱아리는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들이밀었던 촉수는 자신도 모르게 도로 몸에 붙어 버렸다.

“넌 참 시끄럽구나.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가진 것뿐이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누트 샤인에게 흰 검을 찔렀다. 누트 샤인은 무릎을 꿇으며 비나엘르 파라이를 향해 손을 열었다. 그 안에 누트 샤인이 그토록 고생해서 모은 유물이 들어 있었다.

헬리시타, 인카르 신전.

비나엘르 파라이는 보라색 보석함을 쓰다듬었다. 오랜 동안 쌓인 먼지가 비나엘르 파라이의 손을 따라 공중에 퍼졌다.

“그이가 나에게 주었던 소중한 선물.”

보석함을 열자 붉은 스웨이드가 깔린 바닥에는 반지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반지를 꺼내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시간이 흘러도, 이 반지는 여전히 잘 맞네.”

비나엘르 파라이는 보석함을 덮었다.

“아니야.”

비나엘르 파라이는 보석함을 도로 열었다.

“마지막인가. … 이제 가야지….”

틱. 틱.

마치 동굴 같이 생긴 절벽 속의 작은 길은 작은 물방울이 웅덩이에 떨어질 때마다 독특한 소리를 냈다. 아모르 쥬디어스는 숨을 죽인 채, 진입로를 쳐다 보았다. 예전의 지인들을 모아와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를 이긴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니까.

차-악. 차-악.

“….”

눈빛으로 서로의 감정을 전달할 수가 있다. 물이 퍼지고 끊기는 소리. 그가 왔다.

아모르 쥬디어스와 지인들은 일어섰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 서로 작별 인사라도 나누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최대한 숨 죽여 기다리고 있기에 서로 얼굴을 한번씩 읽어줄 뿐이다.

“으아아앗!”

눈인사를 멈추기도 전에, 저음의 독특한 목소리가 어느새 등 뒤로 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등을 돌렸다. 흰 검은 한 개였지만, 어느 새 또 하나가 늘어난다. 두 개의 검이 검은 창공에서 쏜살같이 내려온다.

챙-.

검이 부딪히고 앞에 있던 지인 하나의 머리가 두 개로 갈라지며 쓰러진다. 그의 이름은 필리파르. 방주 아르카나가 막 열릴 무렵 아모르 쥬디어스와 함께 기사단의 정착을 도왔던 인물이다.

휘-익.

화살 하나가 지나가지만 흰 검의 주인은 가볍게 피하며 발놀림을 빠르게 한다. 검이 길어진 것인지, 속도가 워낙 빠른 건지 다음 순간 화살을 날렸던 지인은 허리를 기준으로 상체와 하체가 갈렸다. 그의 이름은 아이리스 비노쉬. 방주 아르카나가 열리고 세지타들을 네오스로 이끈 유명한 세지타족의 수장이다.

“노스 아 제네레아테.”

주문과 함께, 두 개의 흰 검은 몸을 감싸고 회전하기 시작했다. 발 밑의 작은 웅덩이에서 물이 튀어올라 흰 검을 쥔 자의 몸을 감쌌다. 바람과 물은 대화염 범위 마법을 간단히 해체했다. 흰 검이 만든 기둥에서 칼이 수십 자루 튀어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다음 주문을 외우던 지인은 온 몸이 칼집이 되어 버렸다. 카트린. 방주 아르카나가 열린 후 듀스 마블의 보모 역할을 했던 인카르 교단의 마법사였다. 그는 아모르 쥬디어스를 대신해서 듀스 마블에게 마법을 가르쳤다.

피링-.

롤랑 브라코가 부리는 소환수가 나타났다. 아모르 쥬디어스는 마지막 남은 지인 롤랑 브라코 그리고 그의 소환수와 함께 검술을 시작했다. 셋이서 아래 위 옆 할 것 없이 사정없이 찔렀지만, 흰 검은 그것을 모두 피했다. 아니, 검이 흰 검 옆으로 갈 수가 없었다. 흰 검은 방어막 하나를 쳐두고 그 자리에 정지한 채 검의 틈을 노리는 듯 했다.

“으윽.”

롤랑 브라코의 눈이 뚫리고, 소환수의 마법도 풀어졌다. 방주 아르카나가 열린 후 자유분방하게 떠돌아 다니며 요쉬마는 물론 다른 소환술사들에게 흑마법을 퍼뜨린 아모르 쥬디어스의 친구가 쓰러졌다.

“너만 남았구나.”

“왜 이리로 가는 거지?”

“너야말로 왜 나를 막는 거지?”

“그를 잊고 모르는 척 할 수도 있잖아?”

“아모르. 나의 아모르.”

흰 검은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아모르 쥬디어스 가까이로 다가갔다. 아모르 쥬디어스는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웅덩이에 털썩 쓰러졌다.

“세월로 깊게 묻었어도. 핏발선 눈동자에서 삭아 들지 않을 본성이 드러나니, 희생한 자가 내뿜고 있는 집념의 낙인을. 피할 수 없으리라!”

흰 검은 위에서 다시 한 번, 검을 찌르고는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 엘.”

아모르 쥬디어스는 뜨거운 눈물을 한 번 흘리고는 천천히 식어갔다.

차가운 입김이 사방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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