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 - 지옥의 징조 - 15장. Darkness. 암흑 속으로
| 21.01.27 12:00 | 조회수: 889


룸바르트는 캄비라 바투와 함께 시에나가 만들어 놓은 불 마법 속으로 뛰어 들었다. 죽으려고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시에나가 부린 마법의 불 때문에 연기가 피어 올랐고, 연기 속으로 몸을 감춘 것이었다.

“가자!”

“…!”

캄비라 바투는 쿠리오를 억지로라도 끌고 가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아이언 테라클이 끌고 온 군대가 뒤에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쿠리오는 캄비라 바투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래.’

캄비라 바투는 쿠리오를 더 잡지 않기로 했다. 쿠리오는 인간이다. 캄비라 바투, 바기족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사람들이란 늘 바기족을 떠나게 마련이었다. 캄비라 바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가세. 고맙네.”

부하를 잃고 초라한 상황에서 캄비라 바투는 오히려 고마웠다.

“고맙기는.”

룸바르트는 캄비라 바투를 돌아보지도 않고 연기를 헤쳐 나갔다.

“이쪽이에요!”

시에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에나는 캄비라 바투와 룸바르트가 나오는 것을 잘 보고 있다가, 연기 속에서 길을 헤매지 않도록 도왔다. 캄비라 바투는 처음 연기 속에서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시에나인 줄 몰랐다. 희고 가녀린 손을 보고 이끌렸던 캄비라 바투는 시에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신이 나를 구해주었소!”

캄비라 바투는 시에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시에나를 매우 사랑했는데, 시에나가 자신을 구해주다니! 캄비라 바투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마지막 부하였던 쿠리오가 다른 편으로 가버렸는데, 캄비라 바투가 좋아하는 시에나가 아직 남아 자신을 끌어주었다. 시에나의 손길로 캄비라 바투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

“고맙군. 제대로 됐어.”

룸바르트도 시에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시에나는 룸바르트를 보며 웃었다.

“당신이야 말로 대단했어요.”

시에나는 룸바르트를 칭찬했다. 룸바르트는 칭찬받을 만 했다. 원래 룸바르트는 남을 돕는다거나, 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룸바르트 역시 의지 하던, 혹은 친구였던 헤이치 페드론과 떨어졌다. 그런데도 캄비라 바투를 도왔다.

“인카르 것들과는 내가 이야기가 잘 통하지.”

룸바르트는 괜히 머쓱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했다. 게다가 시에나에게 면박까지 주었다.

“뭐, 인카르의 앞잡이였던 당신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나이들끼리 먹히는 게 있지.”

룸바르트의 말이 시에나는 불쾌했지만, 그래도 참았다. 한 때, 듀스 마블 아래에서 그를 위해 일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

시에나가 현실을 인정하려 애쓰는데 캄비라 바투가 시에나를 와락 안아버렸다.

“시에나!”

“…!”

시에나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캄비라 바투의 우람한 근육 때문에, 그리고 바기족 특유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시에나는 어지러워서 쓰러질 지경이었다.

“이봐! 무슨 짓이야! 주위를 봐. 다들 싸우고 도망치고 죽고 있어. 이 한가운데서 꼭 그래야겠어?”

룸바르트는 캄비라 바투와 시에나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캄비라 바투는 쉽게 시에나를 놔주지 않았다.

“오, 시에나.”

캄비라 바투는 시에나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는 또 끌어 안았다. 캄비라 바투의 아귀힘이 너무 세서 시에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캄비라. 정신 차려. 여긴 전쟁터야.”

룸바르트는 캄비라 바투를 말렸다. 탐욕스러운 눈을 하고 달려드는 스틱스와 카본이 사방에 있었다. 룸바르트는 캄비라 바투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기를 바랬다.

“자네 같은 거구가 이러는 거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캄비라 바투는 평소에는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하다가도 자신의 동족이나 시에나와 관련된 일이 발생하면 쉽게 흥분하고 감상적이 되어 버렸다.

“이봐. 계속 그렇게 정신 못 차리면, 우리는 가리온한테 가기도 전에 아이언 테라클에게 다시 잡힐 거야. 아니, 지금 여기서 괴물들한테 죽임을 당할 거라구.”

시에나는 숨을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바로 룸바르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여기서…. 더 가지 못할…. 거예요.”

“오. 시에나. 쿠리오가 나를 떠났소.”

“….”

시에나는 망설이는 듯 하더니, 나직이 말했다.

“쿠리오는 원래 당신을 떠날 사람이었어요.”

룸바르트는 깜짝 놀랐다. 시에나가 너무도 냉정히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침착하기는 했지만 차가운 것은 아니었다.

“시에나. 당신. 무서운 사람이군.”

시에나는 특별히 무섭게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에나 역시 알고 있었다. 쿠리오는 캄비라 바투의 목숨을 노리고 따라다니던 사람이었다. 캄비라 바투는 시에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어요.

“당신은 떠나지 마시오.”

시에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자물쇠가 잔뜩 엉켜 있는 피톤 성의 문이 앞에 있었다.

“늦었어요. 서둘러야 해요.”

시에나는 기다리고 있을 가리온을 생각했다.

“당신도 참 어지간하군.”

룸바르트는 혀를 내두르며 앞장섰다. 시에나가 캄비라 바투의 마음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가리온을 향해서만 열린 마음이 보였다. 그 모습은 꼭 에바 같았다. 룸바르트는 어쩐지 침울해졌다.

에바는 연속으로 활을 쏘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싸우고 있는 가리온을 돕고 있었다. 두 사람은 친구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룸바르트와 캄비라 바투, 그리고 시에나였다.

“가리온. 왼쪽에!”

가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왼쪽에서 달려드는 카본의 머리를 조각 내었다. 가리온은 혼자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지만, 곧 접었다.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중간자라는 신분이 드러나고, 반절의 사람들이 떠났지만, 아직 가리온에게 남은 친구들이 있었다. 가리온은 그들과 함께 가기로 결정했고, 그리고 그 결심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믿음과 신뢰를 그들에게 받고 있었으니까.

‘그래. 마음을 편하게 먹자.’

그러나 에바는 가리온과 조금 달랐다. 에바는 자꾸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원래 에바는 가리온을 좋아했다. 그런데 둘은 어머니가 같았다. 에바는 자신의 마음을 속으로만 간직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에나가 나타난 후, 에바는 감정을 다스리기가 힘들었다. 좋아하는 가리온과 시에나는 무슨 사연이 그리도 애틋한지 서로를 바라볼 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안타까운 감정들이 주변에 퍼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고, 다른 사람과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에바에게는 너무도 힘들었다. 에바는 끝내 크레스포에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가리온은 에바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에바는 좌절하며 일행을 떠났었지만, 가리온에 대한 마음이 절실했기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가리온을 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오른쪽이에요!”

가리온은 에바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검의 방향을 바꾸었다.

“….”

그런데 어느 순간에부터인가 시에나와 룸바르트가 가까워지는 모습이 보였다. 둘은 같은 헬리시타 출신으로 공통점이 많아 보였다. 에바는 전과 다름없이 가리온의 옆에 붙어 있기만 했지만, 이상하게도 눈이 자꾸 그리로 갔다. 시에나에게 친절한 룸바르트. 어쩐지 어색했다. 아니, 에바만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이상해.’

룸바르트가 에바를 위해줄 때, 에바는 그 마음을 받아주지도 않았다. 에바는 오로지 가리온의 옆에만 있을 생각으로 돌아왔고, 그렇게 했다. 남자들 틈에서 어울리며 활발했던 성격은 사라져 버리고, 말 수는 줄어들었다.

‘정말 이상해.’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에바의 화살은 빗나가 버렸다.

“좀 더 제대로 해야죠.”

에바는 등골이 오싹했다. 타마라의 목소리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타마라!”

가리온은 타마라를 보자 매우 반겼다. 가리온이 조금씩 마음을 여는 방식이었다.

“드디어 왔군!”

가리온과 다른 일행들은 피톤 성까지 그리폰을 타고 왔지만, 타마라는 이계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리폰을 타지 않고 혼자 왔다.

“늦지 않았죠?”

타마라는 웃었다. 그 미소로 여기까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넘어갔다.

“에바. 넋이 나가 있는 것 같아요. 가리온 옆에 붙어 있으려면 좀 더 잘해야죠.”

에바는 그런 타마라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공격해오는 괴물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아무 생각 없이, 활을 놓았을 때 에바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야!”

에바는 눈 앞에 움직이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룸바르트!”

다행히 룸바르트가 먼저 에바를 보고 피한 상황이었다.

“시에나에게 전부 빼앗기겠어요.”

타마라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에바에게 핀잔을 주었어요.

“…!”

에바는 미안하고,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말 없이 고개를 숙였더니, 룸바르트가 다가와 에바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모르고 그런 거야.”

룸바르트의 따스한 말이 에바에게는 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에바는 일부러 턱을 더 높게 들고 말했다.

“그래. 실수였어.”

가리온은 쿠리오에 대해 물어보았다.

“쿠리오는?”

캄비라 바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룸바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쿠리오가. 잔바크 그레이 쪽으로 갔나요?”

뒤늦게 상황을 눈치 챈 타마라가 묻자,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룸바르트였다.

“….”

모두 말이 없었다. 무언가 잘못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행들 사이에 감돌았다. 일행은 하나씩 떨어져 나갔고, 에바는 실수로 동료를 죽일 뻔했다. 모두 강한 사람들이었지만, 기운이 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은 가리온 일행의 피를 다시 뜨겁게 달구어 준 것은 괴물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우정과 같은 그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죽이기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우두커니 모여 있는 가리온 일행은 죽이기 좋아 보이는 사냥감이었다.

쿠웩.

누군가 소리치지도 않았다. 다들 원래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었던 듯, 사방에서 다가오는 괴물들을 향해 돌아섰다. 카본의 핏줄을 끊어내고 쓰러뜨리면서, 스틱스를 고꾸라뜨리면서. 피가 뜨겁게 몸 구석구석을 돌고 있음을 실감했다. 괴물들이 가리온 일행의 위력에 놀라 주춤했을 때, 가리온이 외쳤다.

“성으로 들어가자!”

가리온의 손에는 작은 목걸이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가리온을 따라, 일행은 우르르 쇠사슬이 출렁이는 암흑 속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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