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바크 그레이의 일행, 파그노, 칸, 헤이치 페드론 그리고 시리엘 아즈는 룸바르트처럼 이곳의 지리에 익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그것은 서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 헬리시타로 돌아가겠네.”
“좋을 대로 하십시오.”
잔바크 그레이는 헤이치 페드론의 뜻을 막지 않았다.
“일단 서쪽으로 가세. 카시미르 산맥을 타고 가다 보면 크로오 산맥이 나올 테고, 그 때쯤이면 아는 길도 나오겠지.”
페니키는 카시미르 산맥 동쪽 끝에 있는 도시였다. 그러니 서쪽으로 가면 헬리시타가 카시미르 산맥과 크로오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 확실했다. 그리하여 잔바크 그레이의 일행은 서쪽으로 향했다. 가리온과 룸바르트가 지난 숲으로 그들은 들어섰다. 곧 요정의 호수에도 다다랐다. 그러나 잔바크 그레이는 그곳이 요정의 호수인지 몰랐다. 헤이치 페드론 역시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소리 없이 걷기만 했다. 페니키를 지나 카시미르 산맥을 계속 걸을 때도, 이계의 괴물들이 갑자기 나타나 공격할 때도 말이 없었다. 잔바크 그레이와 헤이치 페드론, 시리엘은 그렇다 치더라도 수다스럽기로 유명한 파그노와 칸에게는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파그노와 칸은 별말 없이 싸우기만 했다. 지금 자체가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가리온이 알로켄,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재앙이었고, 그런 가리온과 떨어져 이제 돌아가는 여정은 어쩐지 허무하고 실망스러웠다. 그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잔바크 그레이가 말했다.
“여기서 끝내지는 않아.”
“…?”
“내가 말하는 거 들었지?”
“언제 말인가?”
“가리온이 떠날 때 말이야. 군대를 만들겠다고, 당신을 죽이러 가겠다고 했네.”
“잔바크. 자네. 진실로.”
“그래. 나는 결심했네.”
잔바크 그레이는 굳게 다짐한 듯 보였다.
“나는 야망이 있네. 처음 아이언 테라클님을 따라 헬리시타로 갈 때부터, 결코 저변의 이름 없는 기사는 되지 않을 것을 스스로에게 맹세했네. 이렇게 대륙으로 뛰어든 이상, 자신에게 명예로운 일을 하고 싶네.”
“….”
“그러려면 먼저 힘을 모아야 하지. 파그노. 나와 함께 해주게.”
파그노는 칸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칸은 오히려 파그노를 보았다. 그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
파그노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잔바크 그레이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라면 앞뒤 잴 것 없이 함께 해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파그노도 물론 그렇게 하고 싶었다. 당연히 잔바크 그레이와의 우정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파그노의 머리 속에는 그래도 함께 북부의 모이라이 지역을 돌았던 가리온이 맴돌았다. 그래도 한 때 그를 따랐다. 함께 한 일행들에게서 용기를 배웠고 성장했다. 파그노는 배신하는 짓을 하는 것 같아 망설인 것이다.
“함께 하세.”
잔바크 그레이는 재촉했다. 잔바크 그레이에게는 지지가 필요했다. 그에게도 지난 여행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서로의 안위를 위하여 싸웠던 만큼, 말로 표현하기 힘든 죄책감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지지가 필요했다. 오랜 친구, 파그노의 지지라면 잔바크 그레이는 자신의 신념을 더욱 확실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함께.”
한 번 더 잔바크 그레이가 말했다. 파그노는 이제는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끄덕인 파그노는 잔바크 그레이와 함께 가리온을 칠 것을 결의했다.
“그래. 그러세.”
잔바크 그레이는 기뻤다. 무언가 허전했지만, 어쨌든 기뻤다. 결의를 하고서, 그들은 다시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나서는 원정이, 아이언 테라클로서는 그리 흥분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이언 테라클은 헬리시타를 비우고 싶지 않았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뒤에서 어떻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지 두려웠다. 그렇지만, 이번 원정은 꼭 가야만 했다.
“듀스 마블. 귀찮은 놈.”
아이언 테라클은 입가를 찌푸렸다.
“그 놈은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야. 비나엘르 파라이, 듀스 마블 할 것 없이 모두 각자의 욕심대로 일을 꾸미고 있어. 이러니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나라도 나서서 인카르 교단을 제대로 만들지 않으면, 트리에스테 꼴이 어떻게 되겠어. 흐흐.”
피톤 성에 듀스 마블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후로 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이언 테라클은 성급히 움직이지 않았다. 듀스 마블 정도의 마법사라면 어떤 영웅이 간다 한들, 쉽게 죽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언 테라클은 시기를 기다렸다. 듀스 마블을 잡을 만한 영웅이 나타나지 않을 때를, 듀스 마블의 힘이 떨어질 때를.
혼자 중얼거리던 아이언 테라클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언 테라클과 함께 수백의 군사들이 피톤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언 테라클은 이 군사들을 지휘해 듀스 마블을 진압할 생각이었다.
“이 정도 군사면 충분하겠지.”
아이언 테라클은 듀스 마블을 직접 잡고 싶었다. 트리에스테를 위협하는 초유의 인물 듀스 마블을 아이언 테라클이 잡았다! 이렇게만 되면, 비나엘르 파라이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을 터였다. 또, 될 수 있으면 듀스 마블을 생포하고 싶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무언가 구린 게 있었고, 아이언 테라클이 알기로 듀스 마블만큼 비나엘르 파라이에 대해 잘 아는 자는 없었다. 듀스 마블이 비나엘르 파라이에 관한 진실을 토하게 만들면, 비나엘르 파라이에게 씌워진 여신이라는 왕관은 깨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영예는 아이언 테라클에게로 온다. 이것은 아이언 테라클이 손쓸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헬리시타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야.”
아이언 테라클은 벅찬 미래를 상상하며 힘을 냈다. 이번에 새로 잡게 된, 은 검을 높이 하늘로 올리며 아이언 테라클은 외쳤다.
“자! 가자!”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그의 군대는 아이언 테라클의 호령에 따라 산맥을 탔다. 빽빽한 암석과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인카르 교단의 푸른 깃발이 파도처럼 넘실댔다. 파도의 장단에 따라 기운을 돋우는 북소리가 쩌렁쩌렁 산맥을 울렸다.
둥. 둥. 두둥.
“… 어지러워요.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너무 걸었나….”
시리엘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시리엘의 말대로, 잔바크 그레이의 일행은 쉬지도 않고 계속 걷기만 해왔다.
“그렇군. 정말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아. 귀도 멍멍하니. 꼭 북소리가 들리는 것 같군.”
“아직 멀었을까요?”
헤이치 페드론은 물론이고, 체력 좋은 칸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 나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야.”
“조금 더 힘을 내십시다.”
멀쩡한 것은 잔바크 그레이 뿐이었다. 그는 오기로라도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아직 자신의 뜻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잠깐만. 이거….”
파그노는 일행을 중지시켰다.
“이거 진짜 북소리 아니야?”
“설마.”
잔바크 그레이와 파그노는 더 말하지 않고 앞쪽으로 뛰어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뛸 힘은 물론이고 더 걸을 힘도 없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을 따라 잡으려 노력했다.
“오! 이런!”
“위대한 수호신, 쥬토여!”
잔바크 그레이는 넙죽 절을 했다. 파그노 역시 바닥에 엎드렸다. 그들 앞에서 말이 요란하게 울더니 멈추었다.
“자네들은!”
아이언 테라클은 두 기사를 알아보았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아이언 테라클님!”
잔바크 그레이는 감격에 겨웠다. 거의 죽어갈 때에 수백의 군대를 끌고 가는 아이언 테라클을 만나게 되다니! 잔바크 그레이는 신이 자신을 선택했음을 확신했다.
“어떻게 자네들이 여기에 있는가?”
아이언 테라클은 의아했다. 그들은 가리온과 데카론의 원정을 떠났다. 산맥 한 가운데서 만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돌아 오는 길인가? 가리온은 어디 있는가? 다른 일행들은?”
“아이언 테라클님!”
그때 나머지 일행들이 나타나, 아이언 테라클을 알아보았다. 칸은 당장 달려와 땅에 엎드려 절했다.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은 주뼛주뼛 나와 아이언 테라클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인사를 받아준 아이언 테라클은 제노아의 기사들이 일어나도록 했다.
“일어서게.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주게.”
잔바크 그레이는 이 상황에서 말할만한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동안의 일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로아성에서부터 이상했습니다. 델카도르는 우리를 이상한 곳으로만 보내더니, 복수의 빙곡, 불의 사슬에서 계속 데카론들이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데카론들이?”
아이언 테라클은 잔바크 그레이의 이야기가 너무도 놀라웠다. 전혀 몰랐고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데카론들이 같은 데카론을 공격하다니!’
잔바크 그레이는 계속 말했다.
“네. 데카론들이 계속 따라 붙었습니다. 그리고 엘타에서 그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데카론들이 노린 것은 저희가 아니었습니다.”
“아니다?”
“그들이 노린 것은 가리온 초이였습니다.”
“뭐?”
아이언 테라클은 정말로 놀랐다. 청기사단장인 가리온을 공격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어째서?”
잔바크 그레이는 숨을 한 번 돌리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단단히 결심한 후, 아이언 테라클을 향했다.
“가리온 초이는. 알로켄. 칼리지오 밧슈의 후손이었습니다.”
“뭐?”
“정확히는 중간자라고 하지만, 어쨌든. 그가 제 2의 그랜드 폴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
아이언 테라클은 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다가, 말에서 내려와 잔바크 그레이 앞에 가까이 섰다.
“사실인가?”
잔바크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도 인정을 했습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아이언 테라클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에 경악했다.
“그렇다면…. 슈마트라 초이. 슈마트라 초이는?”
“…. 아무래도. 슈마트라 초이, 검성도 칼리지오 밧슈의 후손일 확률이….”
잔바크 그레이는 신중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려 애썼다.
“그러나 가리온은 자신이 검성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엿들었다고….”
“이상한 소리 집어치우라고 해. 디에네 비노쉬는 검성에게는 두 번째 여자야. 그 전에 다른 여자가 있었어.”
“그런! 사실입니까?”
아이언 테라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검성도!”
파그노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저희들은 가리온을 칠 생각이었습니다. 이 대륙을 멸망시킬 자가, 제노아 출신이라는 것 자체에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검성까지. 그렇다면….”
“자네들. 일단 나와 함께 피톤성으로 가세. 그곳에 슈마트라 초이가 있네. 듀스 마블이 붙잡고 있지.”
잔바크 그레이의 일행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해주겠네. 일단 듀스 마블을 잡은 후에야 슈마트라 초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아이언 테라클은 다시 말에 탔다. 그리고 보좌관에게 물었다.
“여분으로 말이 있는가?”
“송구합니다만, 여분은 세필 밖에 없습니다.”
아이언 테라클은 헤이치 페드론과 시리엘을 보았다. 두 사람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두 필의 말을 더 구하게.”
보좌관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이언 테라클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헬리시타로 돌아갈 것입니다.”
헤이치 페드론이 나서서 말리려 했다. 정말로 둘은 돌아갈 생각이었다. 전투는 그들과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헤이치 페드론.”
아이언 테라클은 헤이치 페드론의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당신은 가리온과 지금껏 함께였소.”
사실이었다. 헤이치 페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신은 듀스 마블을 잘 알고 있소. 그렇지 않소?”
역시 사실이었다. 헤이치 페드론은 당황스러웠다. 한 때 그는 듀스 마블 밑에서 요쉬마 디아메키와 함께 소환술을 연구했었다. 그러한 사실을 아이언 테라클이 알고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그러니, 다른 말 말고 같이 가야겠소. 당신 옆의 아가씨도.”
보좌관은 곧, 다섯 마리의 말을 구해왔다. 아이언 테라클은 말들을 어떻게 구해왔는지는 묻지 않았다. 잔바크 그레이의 일행은 그렇게 아이언 테라클을 따라 피톤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