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이 말에 수군거리던 인카르의 열 두 신관 조디악들은 곧 입을 다물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듀스 마블이 인카르를 제멋대로 휘어잡고 있었지만, 그 듀스 마블도 비나엘르 파라이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방주 아르카나를 계획하고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살려냈다. 또한 방주에서 나온 후에는 인카르를 세워 트리에스테를 안정화시킨 장본인이었다. 즉, 인카르의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 누구도 비나엘르 파라이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소 소란스러운 회의장을 단 한마디로 정리한 비나엘르 파라이는 바기족 이주 건에 대한 전체적인 경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도도한 자태로 가만히 비나엘르 파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랜드 폴의 영향으로 변형체?된 인간들이 바기족이라는 것은 여기 계시는 분들 모두가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변형으로 인간과는 다른 여러 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보다 월등히 강인한 근육과 인간의 체취라 할 수 없는 독한 냄새 말입니다." 비나엘르 파라이의 설명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바기족의 고약한 냄새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길을 잃고 미로의 숲에 잘못 들어간 어린 여자 아이가 바기족의 악취 때문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아이리스 비노쉬도 이미 그 끔찍한 것을 경험했었다. 자덴 성 입구에서의 전투에서 바기족이 쓴 고약한 냄새는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지독한 것이었다.
"그런, 바기족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놀랍게도 트리에스테의 청정지역이나 다름없는 네오스와 자덴 사이입니다. 미로의 숲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자덴이 남쪽에는 네오스가 서쪽에는 바기족의 촌락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기족의 존망과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겁니까?"
듀스 마블이 비나엘르 파라이에게 차갑게 물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이야기를 슬슬 돌리면서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감추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비나엘르 파라이가 말하는 동안에 끼어든 사람이 다른 이였다면 엄중히 문책당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비나엘르 파라이는 화를 내는 대신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방주 아르카나에서 나온 이후 인간들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두 번 다시 그랜드 폴과 같은 절망을 체험하지 않기 위한 생존 경쟁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법사들은 더욱 명석한 두뇌와 정신력을 갖게 되었고, 기사들은 더 탄탄한 몸과 근육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궁사들은 어떻습니까!" 비나엘르 파라이는 아이리스 비노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궁사들은 일반적인 인간들보다 훨씬 뛰어난 오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은 비상할 정도로 놀라운 경지에 올랐죠."
"궁사들의 뛰어나다는 오감에 대해서나 듣자고 모인 자리가 아닙니다."
듀스 마블이 다시 냉랭하게 말을 던졌다. 이 말에 아이리스 비노쉬의 여유로워 보였던 표정이 불쾌하게 바뀌는 것 같았지만, 비나엘르 파라이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으려는 듯 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듀스 마블을 감싸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요.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바기족이 이동되어야 합니다."
전혀 납득할 수 없는 표정으로 웅성거리던 몇몇 조디악들 중 한 사람이 물었다.
"그러한 이유라니요?"
"지나치게 뛰어나다는 그 능력 때문에 바기족이 해가 되니 네오스와 자덴 근처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이야기시겠지요."
듀스 마블이 비나엘르 파라이 대신 냉소적으로 말했다. 아이리스 비노쉬가 노골적으로 듀스 마블을 노려보았지만, 비나엘르 파라이는 다시 친절하게 설명했다.
"궁사계는 지금 자덴이라는 중요한 도시를 인카르의 대표로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궁사계를 보호하는 것은 인카르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바기족이 궁사계가 관리자의 의무를 이행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당연히 저희가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죠."
조용히 지켜보던 아이언 테라클은 조소하면서, 잔바크 그레이에게 속삭였다.
"방해는 무슨. 자덴에서는 다른 광맥에서는 나오지 않는 순금이 나오고 그것을 궁사들이 관리하니, 당연히 그들 편을 들어주려는 것이지."
그러나 조디악의 회의에 처음으로 참가한 잔바크 그레이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저는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능력은 무엇이고, 또 궁사계를 지켜준다는 것은 무엇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하하. 자네는 이 인카르가 얼마나 썩어 빠졌는지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내가 좀 정리를 해주지. 지금 비나엘르 파라이가 하려는 말은 한 마디로 바기족이 너무 더럽고 흉측해서, 시각과 청각이 대단히 예민한 궁사들에게 피해가 되니 강제로라도 이주를 시키겠다는 거야."
"바기족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아닙니까? 충분히 궁사계가 제압할 수 있지 않습니까?"
"내 말이 그 말이라네. 이 트리에스테 대륙에 궁사계를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종족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저런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바기족을 몰아내겠다니. 끌끌……. 저건 다 핑계고, 진짜 속셈은 금이야. 순금! 자덴 광맥을 한 때 내가 관리하지 않았겠나! 거기에는 정말 놀라울 정도의 순금이 있지. 그걸 지금 아이리스 비노쉬가 지키니까, 인카르가 궁사계의 편의를 봐주는 거라고.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아이리스 비노쉬는 비나엘르 파라이님께 바기족을 제거해 달라고 부탁했을걸! 그런데 그건 또 못하지. 마법계 것들은 궁사계가 요구하는걸 다 들어줄 수는 없어. 유감스럽게도 마법계 녀석들이 바기족에게 빚을 진 것이 있거든. 결국 죽이지는 못하겠으니, 떨어뜨려 놓겠다는 속셈이지."
"잘은 모르겠지만,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군요."
아이언 테라클은 듀스 마블을 향해 눈초리를 틀면서 중얼거렸다.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지. 저기 있는 마법사들은 어떻게든 궁사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하는데, 바기족에게는 빚을 진 게 있으니. 흥."
아이언 테라클과 잔바크 그레이는 뒤에서 조용히 속삭이며 웅성거리는 조디악들을 지켜보았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듀스 마블과 아이리스 비노쉬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아이리스 비노쉬도 어느 새 다시 평온해진 모습이었다.
반대로 듀스 마블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듀스 마블의 주위로 마법계 조디악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안건의 결과가 어떻게 끝날 것인지는 모두 알고 있었다. 궁사들의 힘은 바기족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다. 그것을 쉽게 놓쳐버릴 인카르가 아니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조금 전과는 달리 침묵을 지키다가 중앙으로 나섰다. 오늘 처음 참여한 잔바크 그레이와 듀스 마블의 옆에 있는 젊은이를 약간 의식하는 듯 했지만,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렇게는 안 되겠군요. 사실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이리스 비노쉬의 말에 장내가 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여유롭던 태도의 균형을 잃고 근심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리스 비노쉬를 바라보았다. 듀스 마블이 그런 비나엘르 파라이를 조소 띤 얼굴로 바라보다가 대꾸했다.
"사실이라구요?"
"네. 사실대로 자세히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비나엘르 파라이님의 설명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군요."
아이리스 비노쉬가 듀스 마블을 똑바로 바라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사실, 이 일은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세상에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것뿐이죠."
내심 찔리는 구석이 있는 아이언 테라클의 비열하게 생긴 얼굴 가죽이 꿈틀거렸다. 아이언 테라클도 바기족과 거래한 속물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아이언 테라클이 지휘하던 시기에 자덴에서는 어떠한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궁사계에서 자덴을 맡은 후로, 이상하게도 갑작스러운 습격사건이 계속 발생하더군요. 궁사계에서는 처음에 그들을 별 무리 없이 막아내었습니다만, 6개월 전에는 잠잠해 지더니, 또 오늘날에 이르러서 바기족은 아예 전쟁 준비를 하고 다시 나타났습니다."
"내가 있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소."
지레 겁을 먹은 아이언 테라클은 손을 저으면서 강하게 부정했다. 잔바크 그레이는 갑자기 당황하는 아이언 테라클이 이상해 보였다.
"그래요. 그러니까 이상한 거죠."
아이리스 비노쉬는 아이언 테라클을 노려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금으로 된 무기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모든 것이 다 금이었습니다. 갑옷부터 무기까지 어느 하나 금이 아닌 것이 없었단 말입니다. 바기족이 어떻게 그런 금 덩어리들을 가지고 있을 수가 있지요? 바기족이 그러한 금을 6개월 만에 모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아이언 테라클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바기족들은 그 금덩이를 앞세워서, 햇빛이 가장 빛날 때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예민한 우리 궁사들에게 그 금빛은 전투를 수행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의 용맹스러운 실력으로 일단 바기족을 막고는 있지만, 이렇게 단단히 준비해 온 바기족을 계속 이대로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정이 이렇게 된 이상, 바기족에 대한 정당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말을 마친 아이리스 비노쉬가 비나엘르 파라이를 잠시 바라보더니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희 궁사계로서는, 인카르를 위해 자덴을 맡은 우리 궁사들에게 먼저 시비를 건 바기족을 몰살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안색이 어두워진 비나엘르 파라이는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큰 한숨을 쉬었다. 이를 본 아이리스 비노쉬는 더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 같았다.
"어쨌든 몰살이 불가능하다면 바기족을 멀리로라도 이주시켜 버리는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말을 맺었다.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비나엘르 파라이의 안색은 훨씬 밝아졌다. 아이리스가 합의 선을 잘 지켜준 것이 고마웠던 것이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얼른 덧붙였다.
"바기족은 바라트로 옮겨질 것입니다."
아이리스 비노쉬는 바기족을 몰살시키지 않는 대신, 이주 장소를 직접 고를 것을 요구했다. 비나엘르 파라이는 이에 수긍했고, 그렇게 해서 아이리스 비노쉬가 고른 곳이 바로 바라트였다.
"바라트요?"
듀스 마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바라트가 가장 적합할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곳은 오렌다 사막과 영혼의 밀림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어서 인간들에게는 더 안전할 것입니다."
바라트는 비나엘르 파라이의 말과 같이 오렌다 사막과 영혼의 밀림 사이에 끼어 있었다. 오렌다 사막은 트리에스테 대륙에 있는 유일한 사막이었다. 뜨겁게 달구어진 모래가 모든 것을 태우는 곳으로,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길 없었다.
영혼의 밀림은, 사막 옆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녹림이 가득한 곳이었다. 오렌다 사막이 태양이 작열하는 곳이라면, 영혼의 밀림은 나무가 우거져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어두운데다가 곳곳에 늪이 많아서, 사람이라면 절대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영혼의 밀림이었다.
결국 바기족을 바라트로 이주시킨다는 것은 트리에스테로부터 밀어내는 것은 물론, 몰살하겠다는 의미로도 통했다. 전쟁을 일으킬 정도의 군사력을 모은 바기족이 더 커지기 전에 합법적으로 손을 쓰겠다는 비나엘르 파라이와 아이리스 비노쉬의 잔인성을 숨긴 냉혹한 작품이었다.
조디악들이 머릿속으로 바라트를 떠올리며 웅성거리는 사이, 비나엘르 파라이는 바기족 이주에 관한 안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면, 반대 의견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 안건은 통과시키겠습니다. 구체적인 안은 저 비나엘르 파라이와 듀스 마블이 함께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나엘르 파라이와 아이리스 비노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둘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 듀스 마블과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인카르의 차가운 대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자, 그렇다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 볼까요."
듀스 마블이 비나엘르 파라이가 비운 자리를 차지하며 작은 두 눈을 빛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