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 두 번째의 힘 - 11장. Refuge. 피난길
| 20.12.23 12:00 | 조회수: 863


가리온의 붉게 충혈된 눈은 몹시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하지만 또렷한 눈동자와 목소리는 아까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기운이 쏙 빠져나가 버린 듯한 모습에 에바는 너무도 놀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에바 대신 누트 샤인이 입을 열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순간 어리둥절했던 클로비스는 누트 샤인의 눈치를 보더니 에바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니, 다, 달라. 아까랑 목소리가 달라. 다른 사람이야!”

“다른 사람?”

“빙의였던 건가?”

에바와 클로비스는 누트 샤인을 보았다.

“그래. 그래서 아까 그런 힘이 나왔던 거군. 크크. 놈. 끈질긴 핏줄을 타고 났단 말이야. 크큭.”

누트 샤인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에 가리온은 정신이 확 돌아오는 듯 했다.

“네, 네 놈은!”

“크크크. 어리석은 기사 놈. 여전히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구나!”

“이! 웃, 우욱.”

가리온은 방금 전 벽에 튕긴 충격으로 내장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피를 한 움큼 뱉어냈다.

“괜찮아요?”

에바는 가리온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가리온은 가만히 에바를 올려 보았다. 적이 아님은 확실해 보였다.

“날, 알아요?”

“아.”

에바는 약간 뾰로통한 듯 하더니 쌀쌀하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글쎄. 잘 아는 편이라고 할 수 있죠. 노라크 동굴에서부터 여기까지 제가 기사님을 구해드린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노라크 동굴에서부터? 그럼 여기는 어디입니까?”

“다크 홀. 파르카 신전에서 시작되는 지하 통로지.”

“게다가 금지구역이에요.”

클로비스와 에바가 차례로 대답했다. 하지만 가리온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이에 클로비스가 반문했다.

“우리도 자네를 이해할 수가 없다네. 도대체 정체가 뭔가?”

가리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예의를 갖추었다.

“인카르의 청기사 가리온 초이입니다.”

누트 샤인은 자신을 제외한 세 명이 슬슬 이야기가 풀리는 것을 보고 자신이 불리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협소한 다크 홀 안에서 작디작은 자신의 체구는 유리한 것이었지만, 세 사람을 한꺼번에 적으로 돌리게 될 경우에는 뼈 조각 하나 남지 않고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온 남자는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알로켄의 마법에 어느 정도 능통한 것 같았고, 여자는 활을 쏘는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가리온은 알로켄들밖에 쓸 수 없는 광(光)검을 생성해 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두드러지는 것은 좋지 않았다. 누트 샤인은 슬금슬금 구석의 어두운 모서리 틈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용히 사라지는 것은 작디작은 누트 샤인의 주특기였다.

클로비스와 에바는 누트 샤인이 구석으로 사라지는 것도 모르고 가리온에게 집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리온은 다른 사람도 아닌 대 재앙 그랜드 폴과 관련된 그를 들춰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칼리지오 밧슈라고!”

“네, 그래요. 가리온, 당신은 정말로 자신이 칼리지오 밧슈라고 말했어요.”

“이런, 세상에.”

가리온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조각들이 하나로 맞추어지지 않고 있었다.

바기족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 슈마트라 초이는 칼리지오 밧슈의 아들이며 때문에 가리온 자신도 칼리지오 밧슈의 핏줄을 타고 났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때, 내가 친아들이 아니라고.’

가리온은 이 모든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정말 대재앙을 일으켰다는 칼리지오 밧슈의 후손인지, 아니 아버지의 아들이 맞는지, 가리온은 진실을 알고 싶었다.

‘바기족이 그 말을 한 후부터 계속 이상한 일들이. 그래! 바기족!’

가리온이 두리번거리자 클로비스와 에바는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자네, 뭘 그렇게 찾아?”

“아까, 아까 그 바기족!”

“바기족?”

“네, 바기족은 어디로 갔어요?”

“바기족이라구?”

“예, 그 조그마한. 바기족 말입니다.”

클로비스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다음 가리온과 에바가 뭐라고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주 잔인하고 비열한 놈입니다.”

“아마, 고서를 찾으러 다시 올 거예요.”

“고서요?”

“네, 아주 소중히 여기는 것 같던데. 그것도 기억에 없나 봐요?”

“아. 네…….”

에바는 가리온을 진정시키며 일으켜 세웠다.

“가면서 차차 이야기하죠. 클로비스! 우선은 여기서 나가요. 데비나님이 언제 들이닥치실지 모르잖아.”

“그래.”

클로비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서를 내려보며 에바와 가리온을 따라 돌아섰다. 다크 홀의 나선형 계단에 올라설 즈음, 가리온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왜 이곳으로 온 걸까?”

가리온의 의문과 상관없이, 어둑어둑한 통로는 횃불만이 무성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헬리시타의 아침은 언제나 그렇듯 조용하고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듀스 마블은 식당으로 나가지 않고 방으로 가져 올 것을 명령했다. 온갖 아첨꾼에게 둘러싸여 식사하는 것보다는 외롭더라도 혼자 먹는 편이 소화가 잘 되었다. 그리고 생각할 것도 많았다. 시에나가 자덴에서는 잘 하고 있을지, 룸바르트는 제대로 네오스에 가고 있는지, 슈마트라 초이의 아들 가리온 초이를 찾고 있는 수색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조만간 시작될 사죄의식 등에 대해 천천히 되짚어볼 참이었다.

하지만 듀스 마블은 몇 스푼을 뜨는 듯 하다 멈추었다. 양송이가 들어있는 연노랑 수프가 숟가락에서 흘러내렸다. 생각이 비나엘르 파라이에게까지 달하자 듀스 마블은 도저히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요즘 비나엘르 파라이의 태도는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싸늘하면서도 조급했다. 비나엘르 파라이가 그런 태도를 취하자 더 심기가 불편해진 것은 듀스 마블이었다.

듀스 마블은 자신이 인카르를 쥐고 흔들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비나엘르 파라이가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비나엘르 파라이의 마음이 변해 버린다는 것은 듀스 마블에게 상당히 난처한 일이었다.

그런데 슈마트라 초이를 만나고 나서부터 비나엘르 파라이는 약간 초조한 듯 보였고, 아이리스 비노쉬 앞에서는 자신에게 창피까지 주었다. 뒤끝이 시원하지 못한 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듀스 마블은 곧 하인을 불러, 비나엘르 파라이가 슈마트라 초이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고문관은 아마 엿들었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듀스 마블은 다시 천천히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따뜻하고 질 좋은 음식을 먹게 된 것은 비나엘르 파라이와 인카르에 오던 날부터였다.

알로켄족과 인간들의 싸움이 한창일 때, 대부분의 인간사가 그렇듯 헬리시타에도 많은 사람들이 헤어지고 이별했다. 듀스 마블도 그랬다. 대륙이 끊어질 듯이 울려대고, 검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다섯 살이 채 되지 않은 듀스 마블도 부모님을 따라 방주 아르카나로 향했다.

피난길은 고된 것이었다. 땅이 흔들리면 그 단단해 보이던 건물들은 그대로 허물어져 버렸다. 그 건물 밑에는 무고한 사람들이 비참하게 짓이겨 깔렸다. 또래 아이들은 울부짖었고, 돌무더기에 깔린 사람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구원을 요청했다.

“자, 자. 어서 가자. 빨리 가지 않으면 우리도 저렇게 될지 몰라!”

몸을 빼어내려고 애타는 눈빛과 손을 뻗치는 사람을 두고, 듀스 마블은 그렇게 어머니 손에 끌려갔다.

“저 사람 죽을지도 몰라요.”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다 그런 거야. 살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듀스 마블이 아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순간, 저편에서는 등짐에 얹혀 있던 아이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얹었던 사람은 그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이는 땅에 머리를 박고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어른은 그저 앞만 보며 걸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계속 걷기만 했다. 듀스 마블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 얼른 가자.”

짐을 잔뜩 짊어 진 아버지는 듀스 마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짐 안에는 부모님이 지금껏 모아왔던 보석들, 동전들이 잔뜩 있었다.

“조심해요. 여보. 도둑맞으면 큰일 나요.”

“그래. 걱정 마.”

듀스 마블은 방주 아르카나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지만, 사람들이 다 한쪽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앞으로,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길을 갈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졌고, 이제 작은 듀스 마블은 사람들에 파묻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은 듀스 마블은 부모님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 먼저 뛰어가 있을게요!”

“얘!”

“듀스!”

듀스 마블은 어른들의 다리 틈 사이로 신나게 뛰어갔다. 갈수록 사람들 사이의 간격이 줄어들고 있었다. 비좁은 틈을 밀치고 앞으로 나오자 동굴같이 생긴 입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가 방주 아르카나구나!”

듀스 마블은 차오른 숨을 진정시키며 입구 앞에서 부모님을 기다렸다. 사람들은 계속 꾸역꾸역 아르카나 안으로 들어갔다.

“이러다가 우리 자리 없을 텐데…….”

하늘이 더더욱 어두워지면서 두 개의 달이 겹쳐지려 하자 사람들은 더욱 급히 아르카나로 쏟아져 들어갔다. 짐을 놓쳐도 그냥 들어가 버리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밀려 넘어진 사람, 곳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우성치고 있었다. 갑자기 혼자 살아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듀스 마블의 마음은 초조하다 못해 벌벌 떨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며 부모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아버지!”

“어이. 꼬마. 부모님을 잃어버렸구나. 우선 같이 들어가자. 지금 너무 위험해. 달이 거의 다 겹쳐졌어!”

친절하게 보이는 아저씨가 듀스 마블의 손을 이끌었지만, 듀스 마블은 손을 뿌리치고는 홱 달아났다.

“아니에요!”

듀스 마블은 계속 달렸다.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엄마, 아빠가 죽어버렸으면 어쩌지?"

듀스 마블이 피난 행렬을 따라 다시 되돌아가는 것과 반대로 사람들은 점점 더 아우성을 치며 아르카나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크, 큰일이야!”

“빨리. 빨리 가!”

듀스 마블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검은 연기가 땅과 하늘을 잠식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 부모님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듀스 마블이 내뱉은 말은 현실이 되어 버렸다.

“어헉”

“사, 살려줘!”

고통으로 일그러진 부모님의 얼굴이 검은 연기에 먹혀버리고, 팔과 손이 천천히 사라졌다. 하얀 천으로 여러 겹을 감싼 보따리가 제일 나중이었다. 듀스 마블에게도 검은 연기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 순간 듀스 마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거 놔! 나, 난 살고 싶단 말이야! 살려줘!”

검은 연기에 잡혀버린 사람을 두고 방주 아르카나로 허겁지겁 도망가는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듀스 마블은 곧 그 검은 연기를 반드시 피해야만 한다는 본능을 깨울 수밖에 없었다. 검은 연기가 듀스 마블의 자그마한 발에 닿자마자 듀스 마블은 몸서리쳐지는 나쁜 기분을 느끼고 온 몸에 소름이 쫘악 돋고 있었다.

챙-.

듀스 마블은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듀스 마블의 손이 덜덜 떨렸다.

“듀스 마블님!”

“으, 응?”

하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분부하신 것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하인은 듀스 마블 옆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귀에 대고 낮게 말했다.

“고문관이 말하기를.”

듀스 마블의 작은 눈이 번쩍 뜨였다.

“뭐라고 하던가?”

하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나직이 속삭였다.

“나이와 태어난 곳, 부모님에 대해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알로켄족과 파르카 신전에 대해 아는지 물어보셨답니다.”

“뭐라고!”

듀스 마블은 식은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대체 비나엘르 파라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제 와서 무슨 짓을 저지르겠다는 거지? 슈마트라 초이를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찾아내서 뭘 하려고! 설마…… 설마! 안돼! 제 2의 그랜드 폴만은 반드시, 반드시 막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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